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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겸 시인
열흘간의 길고 긴 추석 연휴가 끝났다. 이번 추석 명절 역시 자신의 취업 문제, 혹은 결혼 문제 등 개인사정으로 인해 고향을 찾지 않는 명기족(명절 기피족)들에게는 긴 연휴조차 고통이요, 아픔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픔 없이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 생물학적 현실이다. 나 역시 인간인지라 힘들고 어려운 일에 봉착했을 때에는 거리의 나무들을 생각하며 많은 위안을 받는다.

특히,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을 거닐며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나무들의 행렬을 보거나 상원사 적멸보궁을 오르는 길에 물기하나 없는 바위틈을 비집고 자라나는 소나무를 볼 때마다 그들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을 하게 한다. 지상에 뿌리를 내린 모든 나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나뭇가지만은 하늘로 치켜들며 생명의 빛을 놓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뿌리가 있는 밑바닥에서 물을 길어 올려 몸통을 세우고 머리만은 정직하게 하늘을 향한다.

인간 역시 피할 수 없는 삶과 죽음, 그리고 존재에 대해 탐구하고 숙고하며 살아간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떤 경로로 태어났는지, 어디로 흘러가고 있으며 종착역은 어디쯤일까 하는 의문이 줄을 잇는다. 물론 답은 각자의 삶속에서 천작(天作)할 수밖에 없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대로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아픔의 고통을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나무와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결실의 계절 가을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과일은 아픔을 참고 견딘 나무들의 보석과 같은 산물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생애의 한 주기처럼 생각되지만 그것은 일정한 질서와 순서에 의해 결실을 맺는 것이다. 한겨울 살을 깎는 듯한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봄이라는 계절에 대개의 꽃들은 만개하며 속절없이 질 것이다. 가지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다가 사라져야 하는 꽃잎 같은 아픔을 맛보게 될 것이다. 꽃잎은 나무줄기와의 아픈 이별이 없으면 열매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꽃잎이 어떻게 피어났으며 수많은 시간을 인내하며 기도했는지, 그리고 수정의 과정에서 벌과 나비의 몸짓에 얼만큼 긴장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해 거칠고 어두운 자신의 껍질을 뚫어낸 시간, 미풍이 폭풍으로 변하던 날의 두려움과 맨몸으로 삭풍을 견딘 밤, 가지에서 떨어져 내리던 날의 쓸쓸함과 아픔을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꽃눈의 상처를 다시 보고 싶어도 시간은 되돌아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나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현재 진행의 형태로 우리의 삶은 존재하는 것이다. 열매는 어쩌면 고독하게 자신과 싸우고 또 사회의 경쟁자들과 치열히 경쟁하며 일궈낸 어떤 흔적이며 결과물인 것이다.

인간의 삶 또한 이처럼 순환한다. 니체가 말한 ‘동일한 것의 영원한 되돌아옴’이 그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 회귀’는 무한한 반복이다. 자신의 힘을 다해 꽃을 피워 열매를 남기고 열매는 다시 씨앗이 되고 그 씨앗은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되고 다시 꽃을 피우는 그런 순환의 과정이 이뤄짐으로써 우리가 물려준 본성에 의해 되돌아옴을 거듭하는 것이다. 즉 지금은 고난하더라도 미래는 긍정적인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상승 의지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길과 세월이란 영원히 반복돼 순환하는 생성의 삶인 것이다. 현재의 시간은 힘들어도 아픔을 감내하며 내 자신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삶의 환희를 갖게 되는 비밀의 세계이다. 우리는 영원히 변화하고 순환하며 되돌아가야 하는 흐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만 또한 그래서 아플 수밖에 없는 모순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낙화결실(洛花結實)’ 즉 꽃이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이 싫다고 가지에 붙어 있으면 열매가 아닌 그냥 꽃이다. 지금은 삶의 열매를 맺기 위해 몸과 마음이 아프더라도 참고 견뎌내야 한다. 우리에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희망이라는 긍정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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