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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돌아간 올해의 노벨문학상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본 문학의 저력을 확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저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선진국이라고 치부하기에는 3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의 문화적 수준이 결코 가볍지 않아 보인다.

 정권이나 국가 권력이 함부로 문학과 예술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 간섭이 자칫 예술의 숨통을 조이고 문화의 생명력을 경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1996년에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출간된 뒤 선정성 시비에 휘말려 출판사 대표가 검찰에 구속됐고 작가 또한 사법 처리됐다. 이보다 앞서 1992년에는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작가인 마광수 교수가 검찰에 의해 전격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그 후 작가는 ‘즐거운 사라’ 사건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근무하던 대학에서 직위 해제됐다. 이어 2심에서 항소 기각 판결을 받았으며 대법원 상고심에서 상고 기각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1994년 일본에서는 「즐거운 사라」 일본어판이 아사히TV 출판부에서 번역 출간돼 일본 독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소설 작품에 대한 횡포는 법적 권력에 의해서만 자행됐던 것은 아니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이 소설 때문에 우익 단체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돼 2005년 무혐의 판결을 받기까지 11년간 공권력에 시달려야 했다. 2001년에는 이문열의 문학 사숙인 ‘부악문원’ 앞에서 몇몇 시민단체 회원들이 모여 그의 소설 733권을 관 속에 넣어 책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어떤 작가는 20여 년간 소설을 절필하다시피 했고 또한 어떤 작가는 얼마 전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정래 씨는 극우 세력의 집요한 살해 위협이 지속되자 유서를 두 번씩이나 써야 했고 이문열 씨는 현대에 부활한 듯한 한국판 분서갱유를 목전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경험해야 했다. 참여정부에서의 문화예술계에 대한 편파 또한 정도를 넘어선 바 있다. 노 대통령은 당선 직후에 문화관광부 장관을 비롯해 문화예술진흥원장, 문화재청장 등을 진보 진영 인사로 채웠다. 모든 문화예술계 기관장 자리가 망라됐다. 또한 당시 회원 120만인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는 기득권 세력으로 간주돼 10만의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보다 정부 지원금을 덜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도 이러한 현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10여 년간의 편파 지원에 대한 보수정권의 음습하고 야비한 민낯이 다시 한 번 만천하에 드러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국군사이버사령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글과 댓글 분석을 통해 정치인은 물론 연예인과 운동 선수의 동향까지도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한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법과 국가의 개입은 독약과 같은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미꾸라지는 감시당하지 않아야 용이 된다. 용이 되는 환경은 1급수 청정수가 아니라 4급수 개천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에 있어서 일본에 대한 현해탄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면 보수든 진보든 개천을 오염시키는 획일적 관념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불투명한 구정물은 미꾸라지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장소다. 용을 만드는 개천은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 아니라 통제로부터 자유롭고 간섭으로부터 자율적인 공간이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비정상적인 지원은 검열 못지 않게 미꾸라지를 용이 아닌 이무기로 전락시킬 수 있다. 굳이 노벨상을 탈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굳이 우리가 타지 못할 상도 아니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 이 상을 받을 만한 문화적 토대가 갖춰져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병폐 청산 없이 해마다 엉뚱한 시인에게 노벨상을 기대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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