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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연 수필가
우편으로 배달된 서가인 수필가의 첫 수필집 「밤비에 자란 사람」을 받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떤 일이나 사람에 깊이 빠져 마음을 빼앗긴다는 심취(心醉)란 단어의 의미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격려사나 서평을 받기 위해 유명 문인에게 굳이 거금을 바치지 않고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딸의 축사를 책머리에 실어 정감을 안겨 주었는데 첫 번째 작품 ‘벽지’를 읽는 순간 평소 내가 갈구해 오던 인간미를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뛰어난 두뇌들이 모인 대학의 학창시절, 나는 자기 욕심만 채우고 동료를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에게 ‘약사가 되기 전에 우선 인간이 되라!’고 고언했다.

 자식을 키우면서도 먼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고, 사회생활을 하며 사람냄새 나는 이웃을 찾으려 각계각층과 교우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좀 더 다가가 대화를 하다 보면 드러나는 본색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벽지’의 내용은 이렇다.

 초등학교 4학년 새 학기 초 미술 숙제는 각자의 집 벽지 무늬를 그려오라는 것이었다. 같은 반 친구 숙이는 그림을 내지 않았고 크레용이 없어서 일 거라고 추측한 작가는 가방 속에 있던 크레용을 억지로 건네 준다.

 그러나 숙이는 비밀을 지켜 달라며 자기 집 천장과 사방 벽이 온통 신문으로 도배되었기 때문에 숙제를 할 수 없었다는 사연을 울면서 고백한다. 이 사실을 안 작가는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였지만 아버지에게 부탁해 숙이네 집 방을 예쁘게 도배해 주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신문지 벽지를 흑백 영화에서나 보았겠지만 60세 후반의 세대에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삶’이란 작품에서도 작가의 애틋한 인간미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골목길에 버려진 빈 상자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일흔이 넘어 보이는 파지 줍는 두 할머니가 머리채를 잡고 싸우고 있다. 작가는 두 할머니를 뜯어 말린 후 천 원짜리 한 장씩을 건네 준다.

 잠시 분위기가 진정된 사이 돈을 받은 키 작은 할머니가 잽싸게 파지를 챙겨 리어카에 싣고 달아나듯 자리를 뜨자 분함을 참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작가는 천 원짜리 한 장을 더 건네준다. 이런 선행은 사슴의 눈과 거울처럼 비치는 맑은 심성이 아닌 단순한 적선 의식만으로는 감행할 수 없다.

 작가는 중증 치매를 앓던 어머니를 2년 동안 요양원에 맡기고 끝내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작가는 고려장을 지냈다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선행을 했다지만 돌아가신 부모님 앞에 우리 모두가 불효자인 입장에서 아무나 파지 줍는 노인에게 인정을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스스로를 모자란 사람, 비유하자면 ‘밤비에 자란 사람’이라고 겸손해 한다. 따뜻한 볕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밤새 내린 비에 멋모르고 대를 올려 나약하기 그지없고,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살아온 날들도 허다했다고 반추한다.

 소설가가 꿈이었다는 서가인 수필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의 내조와 자식들의 뒷바라지에 전력하는 현모양처로 살다보니 40대에 들어서 문학에 눈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뒤늦은 60대에 등단했으며 이제야 첫 수필집을 발간했다. 대기만성은 서가인 작가에게 어울리는 단어다. 서가인 수필가나 나나 미래의 꿈을 바라보며 살던 청춘이 이제는 흘러간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세대가 됐다. 서가인 작가의 「밤비에 자란 사람」은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수필집이다.

 인생을 반추하며 붓 가는 대로 쓴 서가인 작가의 수필집이 잔잔한 여운을 안겨주는 까닭은 비록 시적인 미사여구로 장식된 글이 아니지만 인간미 넘치는 진솔한 고백이 감동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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