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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최근 백범 김구(1876~1949)의 청년 시절 이야기가 ‘대장 김창수’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고 있다. 김구가 나이 20세의 청년이었던 시절인 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살해하면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청년 김창수가 625일을 보내면서 인천 감옥소의 조선인들 사이에서 대장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백범 김구 일생을 소재를 다룬 영화는 다수 나온 적이 있지만 그 중에서 청년시절을 중심으로 그린 영화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라 청년 김구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그 배경 장소인 인천이 다시 한 번 재조명되고 있다. 황해도 치하포에서의 사건이 왜 그 관할인 해주가 아니라 인천에서 재판을 받는 것인지, 어떻게 인천에서 2번이나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 것인지, 인천 축항에서 쇠사슬에 묶여 노역을 했다는데 어떤 연유였는지, 백범 김구와 어머니 동상의 건립 장소가 너무 외진 곳이 아닌지 등이 회자되고 있다. 얼마 전 9·15인천상륙작전과 관련해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영흥도 첩보전’, 일명 X-Ray 작전이 영화화돼서 세간에 알려지게 됐던 것처럼 ‘백범과 인천’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계기로 의미가 깊다.

 광복 후 1946년 백범은 "나는 38선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 하고 제일 먼저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깊은 곳이었다. 스물 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스물 세 살에 탈옥 도주했고, 마흔 한 살 적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감됐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를 위해 부모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해 마흔 아홉 해 전 기억이 어제인 듯 새롭다. 인천에서도 시민의 큰 환영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백범에게 있어 인천은 제2의 고향과 진배가 없었고 ‘의미심장한 역사지대’였다.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김구는 그곳에서 한국인으로 변장해 활동하던 일본인을 처단하고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요지의 방을 붙이고 귀가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세 달이 훨씬 넘어 김구가 체포됐고, 일본인 살해사건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본영사관이 포함돼 조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그곳이 바로 인천 개항장재판소였다. 김구는 그의 거사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해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국왕 고종의 재가로 사형 집행은 면했으나 감옥 밖의 구출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깨달은 백범은 탈옥이라는 비상수단을 감행했다.

 김구는 우여곡절 끝에, 만수동에서 부평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벼리고개(별고개, 星峴)를 넘어 당일 양화진(楊花津) 나루에 도착, 서울에서 여러 날을 보내고 다시 삼남(三南) 지방으로 피신했다. 강화 출신 김주경(金周卿), 인천 시천동 출신의 유학자 백초(白樵) 유완무(柳完茂)의 도움이 컸는데, 이름을 김구(金龜)라 고쳐준 이도 유완무였고 그와는 ‘평생 친구’가 됐다. 이름을 다시 구(九)로 개명하고 백범(白凡)으로 한 것은 후일 1912년이다.

 인천을 잘 아는 소설가 김탁환은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부분과 상상력을 더해 독립운동가 백범으로 성장하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찰나를 배경으로, 평범에서 비범으로 나아가는 청년 김창수의 도약을 다루고 있다. 굳이 백범 김구 선생의 위대한 발자취와 대한독립을 위해 몸 바쳐 싸웠던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통해 강한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거창한 취지를 뒤로 하더라도, 인천지역의 근현대사와 관련해 백범 김구 선생의 자취를 인천의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청년 김창수를 둘러싸고 인천의 여러 지사들이 뜻을 함께 하면서 움직였다는 사실 또한 인천의 긍지이다.

 비류 백제의 도읍지로서 2030여 년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인천, 근대 개항 이래 공업과 산업도시로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의 축소판으로서 다양한 역사문화를 간직한 도시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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