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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인천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인천경제자유구역청 제공

그해 겨울의 길목은 무참했다. 진즉에 걷지 못했던, 그러나 나서야만 했던 길은 가뭇없었다. 스스로의 길이 아닌 옭매인 그 길은 거칠고 아득했다. 1997년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요청에 스민 암흑은 그렇게 도드라져 번졌다.

먹잇감을 벼르던 투기자본의 밀물 앞에 우리 것은 처참히 무너졌다. 뭇 사람들은 벼랑 끝 가난 속으로 내몰렸다. 가질 수도, 지킬 수도 없었던 빈궁한 자들은 노숙자와 소상공인의 굴레에 갇혔다.

 ‘개천의 용’은 헛된 꿈을 꾸는 자들의 부질없는 욕망으로 내쳐졌다. 빈부의 틈새는 가마득히 벌어졌다. 파리한 자들은 야윈 삶의 무게에 눌려 버둥거렸고, 기름진 자들은 살찐 삶에 탐욕을 덧대 흐느적거렸다.

 IMF의 서릿발은 인천서 더욱 시리고 메말랐다. 지역 토종 금융이 사위었다. 경기은행이 퇴출의 맨 앞줄에 섰다. 헐거운 규율은 부실대출을 끌어당겼고. 갚음의 고삐마저 풀린 대출금이 크기를 더한 탓이었다. 돈줄이 마른 경기은행은 마침내 부실채권을 끌어안고 고꾸라졌다. 은행원 2천700여 명은 각자 흩어졌고, ‘경기은행’ 간판은 190여 개 점포와 포개져 지워졌다. 부정을 입막음하려는 움직임은 또 다른 부정을 불러들였다. 부실대출이 녹여 낸 검은돈은 정치권에 흘러들어 경기은행 퇴출저지 구실을 했다.

 ‘새나라’와 ‘신진’, ‘새한’의 이름으로 인천 부평에서 뿌리를 내린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의 자생적 내력은 IMF의 날카로운 물마루를 넘지 못한 ‘대우’의 시대에서 잘렸다. 2000년 11월 18일 대우자동차는 무너졌다. 구조조정의 세찬 바람에 생산직 근로자 1천750명이 겨울 앞 낙엽처럼 떨궈졌다.

대우의 부도는 대우 혼자 것만이 아니었다. 1, 2차 중소 협력업체 부도로 피해액이 3천억 원에 달했다. 3차 협력업체 1천500여 개와 항만산업, 서비스업 관련 산업 근로자와 가족 20만여 명의 앞날도 처절했다. 간판이 내려진 음식점과 학원에서 땡처리 집기가 쏟아졌고, 이를 사들여 웃돈을 얹어 파는 중고상들이 부평에서 성업했다.

대우자동차판매㈜도 쓰러져 직원 2천500여 명이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그 아수라의 틈에서도 대우그룹 출신 대표들은 제 살자고 회삿돈을 등쳤다. IMF는 청라매립지를 매립한 동아건설㈜도 자빠뜨렸다. 바다를 메운 농토(1천225만㎡)도 갈렸던 주인처럼 숱한 부침을 겪었다. 지금 그 땅은 상전벽해의 아픔이 서린 청라경제자유구역이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던 남동산업단지도 찬바람이 몰아쳤다. 원자재 상승으로 가동을 멈춘 공장은 부동산 업자들에게 넘어갔다. 더 잘게 쪼개진 공장 터와 더 높은 임대료는 영세업체를 괴롭혔다. IMF의 위기는 생성과 도약의 기회이기도 했다.

외자 유치의 요람 송도경제자유구역의 셀트리온에 외자는 밑천이었고, 글로벌 기업으로 가는 봇짐이었다. 본보는 IMF 20년을 맞아 인천의 영욕을 담아본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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