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용신 씨가 IMF 외환위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 윤용신 씨가 IMF 외환위기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그 때는 IMF(국제통화기금)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뉴스를 보고나서야 아름아름 알게 됐어요." 한국지엠에서 근무하는 윤용신(49) 씨는 IMF 외환위기가 몰아 닥친 20년 전을 되뇌이며 몸서리 쳤다.

윤씨는 24년 전인 1993년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에 입사했다. 그가 직장을 잡았던 1990년대는 굳이 맞벌이를 하지 않아도 생활은 기름졌다. 은행이나 잘 나가는 기업에 입사하면 연봉은 저절로 두 자릿수로 오르는 넉넉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윤씨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IMF 외환위기의 눈보라가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1997년 기아자동차 부도의 불이 붙었고, 대우자동차와 삼성자동차도 퇴출의 고비로 치닫고 있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차가 덜 팔렸어요. 작업장에 서는 날이 그만큼 줄어들었고 동료들과 같이 번갈아가며 쉬었어요." 윤 씨는 공장에 일이 없는 날에는 이삿짐센터 아르바이트도 하고 막노동도 했다. 대우그룹은 1999년 자동차와 ㈜대우 중심으로 판을 다시 짜면서 유동성 악화를 풀어보려고 갖은 몸부림을 쳤지만 끝내 무너졌다.

대우자동차가 GM에 매각된 뒤 2001년 2월, 윤씨는 거리로 내몰린 부평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 1천750명 중 한 명이 됐다. 대우차 해고 노동자들은 강성 노조원이라는 소문이 퍼져 다른 기업에서조차 거들떠도 안 봤다. 2002년 월드컵 열기로 나라 안팎이 축제 분위기로 들떠있었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리에서 주먹을 추켜든 ‘외침’뿐이었다. 윤씨는 세살배기 아기의 기저귀 값을 벌기 위해 신용카드 조회기를 설치하러 다니면서 복직 투쟁을 했다. 같이 해고 당한 동료들 중에는 쪼들리는 생활비로 말다툼을 하다가 아내와 서로 헤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부는 지병으로 숨지고, 일부는 또 투신까지 했다. 수년 간의 노사 협의 끝에 GM대우가 ‘정리 해고자 전원 복직’을 결정하고, 윤씨는 2002년 12월이 돼서야 일터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른 해직자들은 그 후로도 3년이나 힘들게 싸운 끝에 모두 복귀할 수 있었다.

최근 윤씨는 TV나 신문에서 ‘한국지엠 철수설’ 뉴스를 볼 때면 20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가슴을 졸인다. 현재 윤씨가 속한 엔진부에 1천여 명이 근무하지만 요즘은 일감이 없어 일주일에 고작 1∼2일만 일한다. 윤씨는 세금을 빼고 상여금이 포함된 150만 원 남짓한 월급으로 힘든 생활을 가까스로 엮어 나가고 있다. "자녀 하나 있으면 한 달 생활비가 100만 원이 넘게 든다"며 "직원 10명 중 7∼8명은 맞벌이를 하고 있다"고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국민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도록 국가의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해야 합니다." 윤씨는 이 말을 여러 차례 곱씹었다. <관련 기사 3면>

김덕현 기자 kdh@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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