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건설㈜(이하 동아)는 IMF 외환위기 이후 아직 안정을 찾지 못했다.

1998년 기업회생절차(워크아웃) 개시 이후 법정관리와 파산선고를 받고 절차를 밟던 중 법원의 회생 결정에 따라 프라임그룹이 인수했다. 그룹의 계열사 지원이 과다해지자 2014년 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지난해 SM그룹에 편입됐지만 예전 명성은 없고 명맥만 남았다.

▲ 자조근로사업으로 바다를 메운 청라 매립지를 농사 목적으로 9천900㎡씩 분할한 농경지 모습. <기호일보 DB>
동아는 인천 청라국제도시(이하 청라)를 만든 장본인이다. 청라는 김포 간척지 중 농지(1천223만㎡)였던 곳이다. 동아의 김포 간척사업은 ‘동아그룹’ 해체 원인이었다.

 1978년 8월 16일 故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정부는 민간기업이 참여하는 남서해안 간척농지 개발 방침을 내놨다. 이에 동아는 경기 침체로 중동 등 해외에서 놀고 있는 불도저 등 건설 장비(1천110대)를 무관세로 국내로 반입했다. 1980년 1월 14일 농사용 수로 개발 검토도 없이 청라도 인근 해안을 포함해 3천800만㎡에 달하는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농림수산부에서 받았다.

▲ 매립지 물막이 공사 현장. <인천경제자유구역 제공>
1985년 1월 15일 농림부는 1억7천500만 원에 영세 노역자들이 자조근로사업으로 쌓은 제방(6.83㎞)을 동아에 팔았다. 이 제방은 1964년 9월 9일 이명수 전 봉덕학원 이사장이 받은 공유수면(1천275만㎡) 매립면허로 영세 노역자들이 쌓은 것이다. 동아는 이 제방을 합쳐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거여도∼양촌면 오류리 가서도 전체 9.366㎞ 제방을 쌓았다. 이후 전체 김포 간척지 중 농지는 1999년 5월 31일 정부에 6천355억 원을 받고 팔아 넘겼다.

 동아가 김포 간척사업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 간척한 땅 넓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 청라경제자유구역인 청라도 인근 공유수면은 영세 노역자들이 1964년부터 매립권이 대한준설공사로 넘어가기 전인 1971년까지 자조근로사업으로 메운 것이다. 당시 영세 노역자들은 율도∼장금도∼문첨도∼청라도∼일도∼장도∼경서동 고잔 등 7개 섬을 6.83㎞ 제방으로 이어 놓은 상태였다.

▲ 인천시 서구 청라국제도시 전경. 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동아는 율도∼장금도∼문첨도∼청라도 간 1.98㎞ 제방 밖으로 율도∼청라도를 직접 연결하는 제방(1.9㎞)을 쌓았다. 이렇게 생긴 간척지가 400만㎡였다.

 동아가 순수 간척 제방을 쌓은 곳은 장도∼김포군 검단면 거여도∼양촌면 오류리∼가서도 2.536㎞다. 이 제방을 쌓아 만든 2천75만㎡ 간척지는 농경지가 아닌 쓰레기 매립 목적으로 정부에 팔았다. 지금 수도권매립지다.

 당시 환경청은 동아와 1년여 협상 끝에 1988년 2월 10일 매립지 터를 양도했다. 당시 매입가는 450억 원으로 3.3㎡당 7천229원 꼴이었다. 이 땅을 매입하면서 환경청은 수도권매립지 조성 관련 용역, 건설 등 수의계약을 동아와 약속했다. 나머지 김포 간척지 중 동아 소유 밭(338만㎡), 논(791㎡), 영농부대시설(133만㎡) 등 농지는 동아그룹 전체 운명을 결정하는 노른자 땅이었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은 1987년 8월 20일 창립 42주년 기념사에서 김포 간척지를 ‘꿈이 영그는 내일의 들녘’으로 자평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농장을 경작하면서 축적한 기술을 김포 간척지에 적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동아는 1991년 1월 8일 김포 간척지 준공인가 후 농사를 짓지 않아 비업무용 토지 보유로 연간 200억 원의 세금을 물었다.

 사실 동아의 김포 간척지는 ‘조’ 단위 외국자본 투자 유치 허구에 가까웠다.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동아는 실체 없는 외국자본 40억 달러 유치를 내세워 정부에 농경지용인 김포 간척지 용도변경을 압박했다. 김포 간척지 준공인가 7년 뒤인 1998년 4월 10일 1천262만㎡ 땅을 홍콩식 자유도시로 개발하기 위해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저팬(투자중개사)과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용역계약을 맺기로 했다. 같은 해 2월 25일 故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 참석 차 방한한 마이클 잭슨이 김포 간척지 투자와 관련해 최 전 회장과 논의했다는 동아 측 홍보의 후속이었다.

▲ 청라매립지 보상대책위원회 회원들이 과거 자조근로사업으로 매립공사에 참여했던 주민들에게 약속한 땅을 보상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호일보 DB>
동아는 김포 간척지 용도변경을 전제로 1996년 이미 개발 구상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아파트와 상업지구, 관광·여가단지, 첨단산업단지, 중소 산업 연구개발단지, 병원, 컨벤션센터 등 시설을 넣은 ‘월드시티’를 계획했다. 외자 유치로 IMF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겠다고 공언했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농림부가 이 계획에 강하게 반대했고, 동아의 홍콩식 자유도시 건설은 물거품이 됐다.

 회심의 카드가 먹히지 않자, 동아그룹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1998년 9월 구조조정 협약에 따라 동아건설 외 나머지 계열사(동아증권, 동아엔지니어링 등)를 매각하면서 강도 높은 계열사 정리에 들어갔다. 2000년 11월 동아건설이 최종 부도 처리돼 법정관리 대상으로 결정됐다. 이듬해 5월 파산 선고를 받음으로써 대기업 순위 13위(계열사 19개) 자산총액 6조5천억 원의 동아그룹이 해체됐다.

 동아그룹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약 600만 달러 도로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1978년 사우디아라비아 체신청 발주 자동전화 확장공사,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산악지대 산악도로공사, 1983년 리비아 대수로 공사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건설 주력 업종 그룹이었다. 이밖에 운송·엔지니어링·무역·관광·환경·금융 등 각 분야에서 활약을 했다.


 # ‘매립한 땅 준다’ 희망에 돌과 흙 날라 10여 년 노역의 대가 손에 쥐지도 못해

 사실 김포 간척지는 동아건설㈜ 애환보다 가난한 자들의 손길과 땀방울이 고이 서린 곳이다. ‘갯벌을 매립한 땅을 나눠 준다’는 희망으로 전국에서 모인 가난한 자들은 곯은 배를 움켜쥐며 돌과 흙을 날랐다. 1965년께부터 10여 년에 걸친 노역의 대가는 ‘빈털터리’였다. 이들이 쌓아 올린 제방과 간척지는 동아의 먹잇감이 됐다가 농어촌공사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집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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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라매립지 공사장에서 지게로 돌을 옯겨 바다를 메우는 영세 노역자들. <출처=봉덕학원 50년사>
1963년 7월 25일 전라도 출신 수산업자 故 김옥창 씨와 황해도 출신 윤차웅 씨는 양식장 조성을 위한 서구 경서동 청라도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농림부에 신청했다. 이들은 ‘한국천해개발공사’를 세워 보건사회부로부터 자조근로사업장으로 지정받았다. 매립공사는 정부 양곡과 물자 등을 지원 받는 대신 매립한 땅을 자조근로사업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나눠 주는 조건이었다.

 인천시역사자료관이 2009년 12월 펴낸 「인천의 갯벌과 간척」에도 매립 공사에 참여한 주민들에게 9천900㎡씩 땅을 주기로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들은 자금이 부족하자, 1964년 6월 돈을 투자해 매립 공사를 빨리 끝내는 조건을 내세운 이명수 봉덕학원 이사장과 동업 계약을 맺고 천해개발공사 대표를 맡긴다. 이 대표는 1964년 9월 9일 인천 원창동·경서동 해면 1천262만5천500㎡를 수산증식 양어장으로 조성하겠다며 농림부장관에게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얻었다. 그는 2천여 명의 근로 영세민을 동원해 청라 공유수면을 매립하고 있었다. 1968년 7월 23일 공포된 ‘자활근로사업 임시조치법’ 시행에 따른 조치였다. 자조근로사업 참여 영세민들은 미공법 480-Ⅱ에 따라 한 달 임금으로 가구당 50㎏ 밀가루와 옥수수를 받았다.

 시는 1965년부터 3년간 700t의 밀가루와 1967년 양곡 400t도 내주었다. 영세민 1인당 밀가루 배급량은 한 달에 72㎏(하루 3.6㎏×20)이었다. 당시 밀가루 3.6㎏은 120원이었다.

 1969년 7월 18일 박효익 인천 북구청장은 매립면허권자인 이 대표와 ‘토지분배계약서’를 맺었다. 이 계약서는 매립공사가 끝난 간척지를 정부 지원 양곡과 자재비 투자비율에 따라 영세민에게 분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배 대상 영세민 선정은 지역 내 거주자로 자조근로사업에 참여한 실정 등을 감안해 북구청장이 정한다고 나와 있다.

 안타깝게도 1971년 4월 30일 매립면허권이 정부 산하 대한준설공사로 넘어가면서 자조근로사업에 참여한 영세민들은 땅 한 평도 받지 못했다. 세상은 ‘밀가루’ 노역자가 아니라 매립권자인 이 대표 편이었다. 1992년 10월 27일 이 대표 유족들은 동아 상대로 소유권 이전 소송을 제기해 경서동 매립 터 6만7천470㎡를 찾았다. 이 대표는 1984년 6월 1일 매립공사에서 손을 떼는 조건으로 준공 후 땅 6만7천470㎡를 받기로 동아와 약정했다.

 동아는 간척지를 넘겨 받아 홍콩식 자유도시를 계획했지만 정부 반대와 IMF 외환위기로 무참히 깨졌다. 당시 김포 간척지 용도변경은 인천 지역사회에서 화제였다. 1996년 8월 31일 시는 김포 간척지 조성 방향을 시의회에 보고했다. 농경지가 아닌 관광레저단지와 국제업무단지 조성이 골자였다.

 같은 해 11월 21일 시는 ‘2010 인천도시기본계획(안)’을 건설교통부에 냈다. 1천649만㎡ 중 잡종지 236만㎡를 주거·상업용지로 바꾸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건교부 중앙도시계획위원회는 시 계획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포 간척지 용도변경은 끝내 무산됐고, 결국 동아는 김포 간척지를 LH, 농어촌공사, 시 등에 팔았다. 소유권이 바뀌자, 용도변경의 빗장도 풀렸다. 시는 2008년 12월 20일 ‘2025 인천도시기본계획’ 변경을 통해 김포 간척지를 보존용지에서 시가화용지로 바꿨고, 재정경제부는 2013년 8월 11일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했다.

 농어촌공사는 1999년 8월 19일 김포 간척지 1천223만㎡를 6천355억 원에 매입했다. 2000년 7월 20일 농어촌공사는 국토연구원에 의뢰해 첨단농업, 스포츠·레저·관광단지 조성을 주요 내용으로 용역 결과를 내놨다.

 이후 주인이 LH로 바뀌면서 첨단농업을 축으로 한 스포츠·레저·관광단지 조성계획은 신기루가 됐다. 대신 투자유치용지와 국제업무(금융)단지 등이 껴 들어왔다. 돈이 되는 주택건설용지를 먼저 개발하기 위한 ‘꼼수’였다.

 정부는 2002년 4월 4일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지 실현 방안’을 내놓았다. 개발 주제는 ‘자연과 레저가 함께하는 국제금융도시 김포매립지’였다. 김포매립지(1천623만㎡)와 인근 청라매립지(100만㎡), 사유지(83만㎡) 등 전체 1천806만㎡가 대상지였다. 2017년 완성을 목표로 용지비와 시설이전비(1조1천618억 원), 조성비(8천915억 원) 등 총 2조5천227억 원(2004년 기준)의 사업비를 들여 주거·업무·레저·첨단농업 기능을 갖춘 복합도시로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김포매립지 토지이용계획과 도입 시설을 확 바꿔 놨다. 전체면적(1천623만㎡) 중 51.6%(838만㎡)였던 농업단지는 화훼단지(190만㎡)로 변경되면서 면적이 22.7%로 크게 줄었다. 대신 오피스 빌딩(43만㎡)과 외국인 주거(33만㎡), 외국인 학교(6만7천㎡) 등 국제업무용지(110만㎡)를 늘렸다.

 김포매립지는 ‘청라국제도시’로 이름이 바뀌면서 농업단지를 아예 빼고 1천792만㎡의 금융·레저·업무 중심복합도시로 잡히기 시작했다. 사업비는 6조1천억 원으로 급증했고, 투자유치, 주택건설용지 중심의 토지이용계획이 짜여졌다. 투자유치(26.3%)와 주택 건설(13.6%), 산업시설(10.5%), 상업·업무시설(5.4%), 공공시설(44.1%) 등이 그것이다. 청라국제도시 안 화훼단지는 140만㎡로 줄더니 그나마 지금은 42만㎡ 밖에 남지 않았다.

 # 동아건설㈜ 김포 간척지 추진 경위
 
 ▶ 1978년 8월 16일 : 민간기업 참여 간척사업 방침 확정
 ▶ 1980년 1월 14일 : 공유수면 매립면허(면적 3천800만㎡)
 ▶ 1988년 2월 10일 : 수도권매립지 양도(면적 2천75만㎡)
 ▶ 1991년 1월 8일 : 준공인가(매립면적 1천649만㎡)
 ▶ 1993년 12월~1997년 4월 : 8차에 걸쳐 동아건설에 농업용수 공급 촉구
 ▶ 1997년 7월 19일 : 동아건설이 자사 부담으로 용수공급하기로 통보
 ▶ 1997년 12월 15일 : 용수로 공사 사업시행 인가(농림부)
 ▶ 1997년 12월 30일 : 용수로 공사 착공 통보(동아건설)
 ▶ 1998년 2월 25일 : 마이클 잭슨 김포매립지 방문
 ▶ 1999년 5월 31일 : 정부 김포간척지(1천223만㎡) 매입계약 체결(6천355억 원)

 # 청라 매립(간척) 사업 추진 경위
 
  ▶1963년 10월 24일 : 수산양식 목적 공유수면 1천425만㎡ 매립허가 신청(김옥창→농림부)
 ▶1964년 2월 16일 : 주민 대표와 이명수간 동업계약서 체결
 ▶1964년 6월 10일 : 면허신청자 명의 변경(김옥창→이명수)
 ▶1964년 9월 9일 : 공유수면 1천275만㎡  매립 면허 취득(농림부→이명수)
 ▶1964년 9월 10일 : 매립 공사 착수
 ▶1964년 9월 15일 : 보건사회부로부터 3년간 매월 미국의 무상원조로 양곡, 물자 의류 지원 약속
 ▶1968년 2월 16일 : 건설부 매립 목적 변경 허가(수산양식→공장부지 조성)
 ▶1968년 2월 16일 : 매립면허 허가권자 변경(농림부→건설부)
 ▶1969년 7월 18일 : 토지분배 계약서 체결(북구청장→대표 이명수)
 ▶1971년 5월 11일 : 건설부에 매립기한 연장 신청
 ▶1971년 5월 11일 : 건설부 매립면허권리 토지 권리양도·양수 허가(이명수→대한준설공사)
 ▶1972년 10월 31일 : 건설부 대한준설공사 매립면허 취소 국유화 조치

이창호 기자 ych23@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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