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단지에 모여 함께 꿈을 키웠던 친구들이 빚에 쫓겨 인사도 못한 채 떠날 때가 가장 속상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았으니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정말 힘들고 안타까운 일이 많았어요." 남동인더스파크에서 도금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신규식(66) ㈜대한지엠피 대표는 산단 탄생과 역경의 파고를 함께 겪었다.

▲ 신규식 대표.
그는 남동인더스파크 1단계 사업 준공 이후 기업들이 입주하기 시작한 1991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갓 조성된 남동인더스파크는 신 대표의 희망이자 도전이었다. 도금단지로 들어가면서 1984년 당시 북구 십정동에서 시작한 작은 공장 규모를 확장했다. 직원도 6명에서 10명으로 늘렸다. 은행 빚을 지긴 했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 건설업이 호황기를 누리면서 건축자재를 납품하던 그의 회사도 공장 기계가 꺼질 틈 없이 바빴다. 1997년 초까지도 한 달 자재(볼트·철구조물 등) 거래량이 400t을 웃돌았다. 전국 도매상으로 물품을 실어 나르는 5t 화물차가 하루에도 몇 차례나 공장을 오갔다.

 그래서였을까. IMF 외환위기가 들이닥쳤을 때도 신 대표는 이 위기가 오래 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의 그림자는 느리지만 짙게 남동인더스파크에 드리웠다.

 신 대표는 "큰 업체들이 무너지면서 영세 기업 발주물량이 끊겨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며 "집까지 다 담보로 맡기고 거래처마다 돌아다니며 결제일을 미루는 게 일이었다"고 말했다.

 자재 거래량은 1998년 중순 150∼180t가량으로 절반 이상 뚝 떨어졌다. 아침에 출근을 해도 주문 물량이 없어 오전에만 공장을 돌렸다. 그마저도 없는 날이면 신 대표는 직원들과 화성, 안양 등 경기도의 큰 공장으로 일감을 구하러 다녔다. 식비를 아끼려 도시락을 싸 들고 다녔지만 기름값도 못 건지는 날이 허다했다. 자금난을 못 버틴 동료 사업자들은 떠나갔다. 버티다 못한 공장들은 소규모로 임대를 놓고 다 빠져 나가 남동인더스파크는 ‘벌집’처럼 변했다. 그나마 신 대표는 2005년 자동차부품으로 업종을 돌려 살아남았다. 현대, 기아 등에 연료계통 부품을 납품하는 기업의 도금공정을 맡아 기업을 꾸려가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지식산업센터인 ㈜일진단지의 대표를 다시 맡았다. 남동인더스파크에서도 지식산업센터는 형편이 나은 편이다. 그러나 뿌리산업을 취급하는 대다수의 공장은 20년 전 열악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를 따라 들어간 표면처리 공장들은 165㎡ 남짓의 한 공간을 사무실, 화학물품보관소, 작업장 등으로 쪼개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뿌리산업이 중국 제조업에 밀려 소기업들은 IMF 외환위기 때보다 더한 자금난, 인력난을 겪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그러했듯 최근 신 대표는 변화의 필요성을 간절히 느낀다.

 신 대표는 "뿌리산업이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술을 고도화하고 기업이 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며 "기업들도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고 시대 변화에 따라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3면>

홍봄 기자 sprin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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