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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송 국제펜클럽 인천지부 부회장
게을러진 대낮을 태우고 운염도로 출사를 갔다. 세상에서 소환한 구름과 더 이상 상실을 만들지 말라는 바람과 함께, 출정하는 병사처럼 결연히 출발했다. 가는 길 내내 피사체가 되어줄 장소와의 대면을 기대하는 마음이 설렜다. 섬 초입부터 칠면초가 지천으로 붉었다. 늦가을 숙연해지는 계절 속에 땅은 메말라가도 붉은 군락이 광활했다. 섬의 땅은 바닷물길이 막혀서 거칠어지고 생채기가 생겨났다. 바다는 우리의 의지로도 잡을 수 없고 그렇게 멀어진 손바닥이었다. 새로 옹알이를 시작한 땅이 하얗게 갈라져 섬의 식물들은 소금 눈물을 빨아올려 핏대 같은 꽃을 한정 없이 피워냈다. 같이 간 그녀에게 칠면초로 부케를 만들어 줬다. 사연 깊은 그녀에게 칠면초부케는 의미를 더해줬다. 칠면초부케는 한적하고 고즈넉하고 조금은 쓸쓸하고, 흙먼지로 약간은 어수선하고 끊임없이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에 땅은 더 갈라지는 이곳에 어울리는 부케가 됐다.

 무늬 고운 갈라진 땅에 그녀를 앉히고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그녀 인생의 안착을 빌었다. 이곳의 바람은 메마르고 거칠었다. 황량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수분을 빼앗아 갈라진 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섬의 식물들은 세상에 꽃대를 올리고 처연한 인내로 꽃을 피워냈다. 메마른 바람이 훑고 가면 갈라진 땅의 무늬는 사람 손보다 더 정교하게 치밀해져 가고 수분을 빼앗긴 땅에는 하얗게 소금 꽃이 피어났다. 원래 이 땅이 바다를 품은 곳이었지. 견뎌 낸 소금 눈물이 땅위로 배어 나와 갈라진 면에 하얗게 돋아나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대사리가 되면 갯골에 바닷물이 차올라 칠면초가 있는 갯벌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물에 잠긴 갯벌에 칠면초가 광활하고 하늘의 구름은 맑아서 눈이 시리고 흰 구름은 푸른 화폭에 그림을 그렸다.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고 마음이 편해졌다. 갈라진 땅에도 생명이 질기다. 드물지만 이 메마른 땅에도 식물은 뿌리를 내리고 아주 가끔 구절초를 닮은 것 같은 꽃을 피운 식물도 보였다.

 물가 쪽으로 무수한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건조한 바람은 갈라진 땅의 물기를 거두어 하늘에 구름을 만들었다. 섬의 쇠락과 늦가을이 주는 애잔함이 더해져 멜랑콜리한 출사가 되었다. 누구는 피사체가 되고 누구는 사진작가인가. 둘의 관계는 자웅동체처럼 대상이었다가 실행주체가 되었다가 하면서 양쪽을 동시에 사는 것 같다. 우리는 흔히 타인을 주시하며 내면을 읽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판단과 비평에 일가견이 있는 자신을 치하하면서 남다른 비범함에 자부심을 가지기도 한다. 그는 생각 없는 사람이고 그녀는 본데없이 사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들은 나보다 하수의 인생이라고 판단한다. 더 조증이 치솟으면 신경증적인 오만이 발동해 그들은 내려다보면서 실례를 범하는 일도 생긴다. 문제는 본인이 진짜 한 수 위인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오류다. 반석 단단한 사람은 타인이 다져온 반석도 가치 있다 여긴다. 자존감이 깊은 사람이다.

 자존심과 자존감에는 차이가 있다. 열등을 감추기 위해서 내세우는 일련의 행위를 자존감 세다로 오인하는 것 같다. 상담심리학을 전공한 상담사에게서 들은 말이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은 상처를 자기 눈에 약하다고 생각되는 타인에게 별 죄의식 없이 내 뱉는 경우를 보게 된다. 동시에 힘이 있는 직책이나 자산을 가진 사람에게 극 공손한 양면의 처세도 가지고 있다. 양면성 발달한 사람이 정치를 하겠다, 단체의 장을 차지하겠다며 두꺼운 얼굴로 나서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세상을 사는 출사는 서로를 애잔하게 바라봐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좀 따뜻하고 좀 편안한 당신들이 많아진 세상에서 피사체가 되었다가 사진작가가 되었다가 가끔은 안부를 물어주는 인연이고 싶다. 12월의 초입에는 서로를 손짓하며 불러 봐주어 누군가에게 따뜻한 인정으로 기억되는 사람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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