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는 ‘갱생(更生)주택’으로 불렸던 집단주택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한 군수공업단지를 인천에 조성하면서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집들이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삶이 어려운 이들의 터전이 되거나 흉물로 남아 있다.

본보는 일제유산인 집단주택에 담긴 역사적 아픔과 보존가치가 있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 일제강점기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1937년 설립한 조선기계제작소의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동구 화수동 사택. 사진은 일부만 남아있는 사택(왼쪽)과 사택 내부 모습.  <시립인천박물관 제공>
▲ 일제강점기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1937년 설립한 조선기계제작소의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동구 화수동 사택. 사진은 일부만 남아있는 사택(왼쪽)과 사택 내부 모습. <시립인천박물관 제공>
인천에는 193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 공장들이 곳곳에 세워진다. 1934년 동양방직을 시작으로 각종 직물공장과 제분공장, 조선기계제작소, 조선제강소 등의 중공업 공장들이다. 이후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인천은 군수품 생산과 수송을 위한 군수공업단지로 성장한다. 인천의 주택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일제는 영세민들을 위한 관영주택을, 일반기업은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사택을 곳곳에 건설한다.

지방관청에서 주민에게 공급하기 위해 지은 주택을 부영주택(府營住宅)이라고 했다. 1920년 빈민들의 ‘갱생(更生)’을 목적으로 경성과 부산, 대구, 순천 등지에 ‘부영주택’, 또는 ‘읍영주택(邑營住宅)’ 이름으로 건설된다. 인천부는 1930년 후반 각종 공장유입과 도시 확장으로 인구가 증가하자 부영주택을 계획한다. 1940년에는 도원동에 당시 지명을 딴 ‘도산주택’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건설됐다. 1941년에는 2차로 부평주택 300가구를 계획한다. 당시 계획된 부지는 총 6곳으로 숭의동과 용현동, 금곡동, 주안동, 부평동 등이다.

조선총독부에서 설립한 공영주택기관인 ‘조선주택영단’에서도 인천에 ‘영단주택(營團住宅)’을 건설한다. 영단주택은 용현동 1곳과 숭의동 3곳에 건설됐다. 그 중 1943년에 남구 용현동 488번지 일대에 건립된 용현동 영단주택은 32동, 95가구 규모로 지어진다. 현재는 24동, 74가구만 남아 있다. 이 같은 집단주택은 우리나라 아파트의 기원이 됐다.

손장원 재능대학교 실내건축가 교수는 "화장실과 욕실이 실외에 있던 한옥과 달리 표준설계 방식으로 건설된 집단주택에는 화장실 등이 실내로 들어오게 됐다"며 "현재 아파트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말한다.

일반 회사들이 노동자들을 위해 지은 사택도 다수 존재한다. 중구의 동양방직 사택을 비롯해 조선기계제작소 사택, 히로니카상공 사택, 제국제마주식회사 사택, 도쿄시바우리제작소 사택, 경성화학주식회사 사택 등이다. 이 중 조선기계제작소는 초기 광산기계를 제작하던 회사로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던 1937년 6월 설립됐다. 이후 1943년 일본 육군의 잠수함 건조 명령으로 조선소로 전환됐고, 부품생산을 위한 기계공장과 종업원 숙사 등이 건설됐다. 노동자들을 거주시키기 위한 사택도 동구 화수동과 송현동 일원에 건설된다.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다.

이희인 인천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은 "1930년대부터 대규모로 공급된 집단주택들은 인천의 도시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자료"라며 "인천이 공업도시로 조금씩 변하면서 도시 성격도 바뀌게 되고, 주택도 더 좋게 지어졌다"고 말했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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