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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섭 인천시 재난안전본부장
아파트공화국은 이미 겨울이건만 게릴라처럼 잠복한 모기와 달갑지 않게 조우가 잦은 곳이 엘리베이터 안에서다. 모기는 혐오와 두려움과 분노의 대상으로 고정관념화 돼 있다. 사회심리 혹은 문화심리 연구자라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모기와 맞닥뜨린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반응은 사회상황이나 문화맥락에 따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를 흥미롭게 관찰했으리라. 모기, 모기가 주는 혐오와 공포는 우리사회 도처에 존재하면서 나 혹은 타인에게 있을 수 있는 현재적 혹은 잠재적 위험의 은유다. 엘리베이터는 이런 위험과 마주한 우리의 인식과 행동이 선택되는 시공간이다.

 독일 사회학자 벡(Ulich Beck)은 현대산업사회를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로 규정했다. 이때 위험이란 직접적 위험의 상태(danger)뿐만 아니라 산업화가 낳은 기술과 과학, 담론, 사회구조와 시스템일 수도 있다. 그것들이 위험을 낳는 사회적 근원으로 돌변할 가능성은 그에 내제된 풍요 지향의 원리와 구조 때문이다. 물질적 풍요를 향한 동물적 생존경쟁 논리는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라는 진화주의와 한 몸이다. 적자생존의 틈바구니에서 삐져나오는 온갖 위험은 결국 개인의 책임이 되고 궁극적으로 약자에게 전가된다. 한국사회는 서구사회가 오랫동안 겪은 산업화의 우여곡절과 터널을 유례 없이 압축적으로 앞만 보고 통과하면서 과실(果實)을 누렸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산업화·도시화의 그늘에 가려졌던 상처들이 꼭 한 세대를 건너 한강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는 위험으로 극명하게 나타났다. 양극화, 약자 차별과 소수자 배제, 혐오의 사회적 양산과 만연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사회갈등지수,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행복지수로 표현된다. 이런 현실을 성찰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고발하고 비판하며 참여하는 것을 통해 위험사회로의 폭주를 멈추게 적어도 느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모기, 엘리베이터 안의 위험과 마주한 우리의 선택은 크게 두 갈래다. 나에게 덤비지 않는 한, 즉 내게 닥친 현재적 위험이 아니라면 피하면 그 뿐. 혹은 누군가에게는 해악을 끼칠 그놈을 내가 인지한 이상 나는 피할 수 있으되 그 누군가를 위해 내가 손수 척결에 나서는 것.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준 성서 속 사마리아인이 있다. 반대로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며 죽어가는 사람을 조롱한 청소년들, 심장마비로 의식 잃고 죽어가는 택시기사는 내팽개치고 트렁크 속 골프백만 갖고 사라진 사람들도 있다. 법과 양심, 개인의 자율성이 충돌한다. 여기 나치 전복을 꾀하다 체포돼 처형된 신학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미친 사람이 큰길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목사인 나는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을 위로하는 걸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핸들을 빼앗아야 옳지 않았겠는가?" 그는 ‘옥중서간’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고통을 당하고 매 맞고 죽는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목사 니묄러(Martin Niemoeller)는 위험에 대한 ‘침묵의 대가’를 이렇게 증언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가둘 때/ 나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조에게 왔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조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태인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그들이 내게 왔을 때/ 아무도 항의해 줄 이가 남아 있지 않았다."

 지인이 말했다. "엘리베이터 모기는 대개 뒷덜미에 몰래 붙어서 집안에 숨어들지. 그러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땐 뒷덜미를 조심하라고." 맞다. 뜻하지 않은 어떤 위험도 친절하게 내 앞에서 인사하며 다가오지는 않지. 뒤에서 느닷없이 우리 뒷덜미를 확 붙잡아 버리지. 대부분 사람들은 모기가 우리 몸속에 제 주둥이를 찔러 넣은 뒤에야 알아챈다지. 따끔한 고통을 느낄 땐 이미 늦지. 피 빨린 뒤 때려잡아도 사후약방문이지. 그러니 발견 즉시 신고 아니 타살해야 하는 건 그게 이타적일뿐 아니라 지극히 이기적이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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