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下心)은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이다. 나를 낮추니 자연히 상대방은 높여진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낮춘 사람이 더 높아지고 평안하고 크게 넓게 본다.

 일상사에서 하심을 반추하게 만드는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본다. 작심하고 상대방을 혹은 해당기관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은 제보는 기자들이 자주 접하는 취재원(取材源)이다. 하지만 99.9%의 제보에는 하심이 없다. 아니 하심이 있을 수 없다. 상대방이 하는 짓거리를 꿈에서도 용납할 수 없어서다. 그래서 용기를 내 알음알음 언론사 기자를 만나 저간의 사정을 쏟아낸다. 자료와 녹취물도 갖춰져 있다. 피제보자의 입장과 멘트까지 담겨 있다. 그러나 선별된 팩트는 객관을 가장한 주관이다. 나는 살고 그는 죽어야 하는 논리 속의 열거된 팩트는 듬성 듬성 골라낸 편집된 팩트다. 노련한 기자도 하심 없는 취재원의 일면 충실한 팩트에 넘어가곤 한다. 제보를 덥석 베어 물어 본다. 선별된 팩트는 삽시간에 기사화된다. 이제 일말의 하심을 한때마나 품었던 피제보자의 반격이 시작된다. 더 종합적이고 치밀한 팩트를 연속적으로 들이댄다. 기자와 데스크는 출구전략을 고심한다. 나만 세우는 사람들의 제보에는 이토록 큰 함정이 도사린다.

 두 번째 사례도 유사하다. 분노와 화가 많은 사람들이다. 당연히 삶의 기반에 하심이 깔려 있지 않다. 한발 물러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하심하려고 해도 당최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매사의 불만과 화로 인해 하심이 잘 작동되지 않는다. 문제는 하심 없는 그가 주변에 미치는 미세한 파장과 오염이다. 그 한 사람의 하심 없음이 모두의 하심까지 야금야금 갉아 먹는다.

 세 번째는 남은 자에 대한 배려, 혹은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을 헤아리지 않는 경우다. 남겨진 조직원을 위해, 남은 가족을 위해 떠나는 자는 조용히 물러 나야 한다. 그래야 남은 자가 버티고 또 고단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평소 하심이 없기에 떠날 때도 부산스럽고 요란하며 남은 자에 대한 예의도 베풀 줄 모른다. 삶은 계속돼야 하기에 떠날 때 만이라도 하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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