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4천 명. 2차 세계대전 중 심리적 문제로 후송된 미군의 수라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장병 선발은 1차 세계대전 때보다 서너 배 까다로웠지만 정신질환 발생건수는 외려 3배나 높았다. 전장심리 문제는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전장의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연히 발생한 일을 불길한 징조로 여기고 전쟁에서 패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을 전장심리학 용어로 ‘피암시성의 증가’라고 한다.

 러시아가 자랑하던 세계 최강 발틱함대가 일본 도고함대에 궤멸당한 러일전쟁 사례는 유명하다. 군함 38척 중 35척이 풍비박산 난 원인은 ‘일본 구축함이 덴마크 해협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망상에서 비롯됐다. 당시 일본의 해군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발틱함대는 싸우기도 전에 공일증(恐日症)에 사로잡혀 일본이라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사령관인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스스로도 그렇게 확신했다. 출발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일부 군함에 고장이 생기고 사고가 나자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함대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전투는 하나마나였다. 피암시성의 증가 사례는 전장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이 같은 현상은 도드라진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영혼 없는’ 글과 사진을 도배하며 자신이 얼마나 바쁘게 하루를 보냈는지를 쉴 새 없이 알리거나, 경쟁자가 같은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견디지 못해 수차례 행사 시간을 변경하도록 하는 꼼수를 부리는 것도 피암시성의 증가에서 오는 이상 행동들이다. 자신은 모르겠지만 한 발짝 물러서 있는 제3자의 눈에는 그가 얼마나 낙선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지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시험 당일 아침을 먹다가 우연히 떨어뜨린 숟가락에서 ‘낙방’ 공포를 느끼는 것과, 동일 행사장에서 만난 경쟁자를 보며 ‘낙선’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피암시성을 감소시키지 않는 한 패전이든 낙선이든 낙방이든 결코 당신 곁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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