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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락기 시조시인
올 섣달은 무척 추운 편이다. 한강이 일찍 얼기로는 71년 만이란다. 게다가 눈까지 많이 내린다. 하얀 눈송이가 하염없이 흩날릴 때는 한순간 꿈속에 잠기기도 한다. 메마른 세상살이 잠시 잊고 포근한 행복을 맛본다. 밤새 추위에 저 눈이 얼면 빙판길의 애로며, 한데서 일하는 분들의 아픔은 더할 수 있다. 무정물인 백설의 양면성이다. 밤하늘 그토록 아름답게 빛나며 사라지는 별똥별도 가까이하면 비수가 되어 꽂히는 운석파편인 거와 다름없다.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둘 때 빛이 난다. 길거리 맹추위 속에 누군가 일당벌이로 나눠주는 전단지를 받아가는 것은 아름답다. 퇴근길 모서리 포장마차 잉어빵을 사들고 가는 것도 정겹다. 도시의 지붕마다 시골의 산천초목마다 새하얗게 쌓인 만설은 일단 낭만이다. 이를 제재로 한 영화나 음악 작품은 많다. ‘나리는 눈이 산천을 뒤덮듯 정든 임 사랑으로 이 몸을 덮으소’라고 민요 ‘한오백년’은 노래한다. 만설은 바로 사랑의 이불이 된다. 사랑이란 말은 진부하지만 싫증나지 않는다. 어쩜 그 말이 늘 우리 곁에 함께 살고 있을까. 세상의 삶 자체가 사랑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슬픔도 노여움도 사랑의 다른 모습이다. 사랑은 넓고도 크다. 차갑고 다소 음습한 만설 속에서 잊지 못할 사랑이 스쳐갔다.

 1942년에 만들어진 흑백영화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를 다시 봤다. 1차 세계대전 승리 후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간의 봉별과 흑백광경은 눈 내리는 그 자체의 아늑한 분위기와 흡사했다. 파스텔화 사랑이다. 시방은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바뀌는 시대다. 진득한 이상적 사랑은 상상의 그림 속에 넣어 둔다.

 얼마큼의 우리네 인생살이, 시시때때 사랑을 주고받는다. 대개는 주는 만큼 온다. 주관적 생각으로는 많이 줘야 어느 정도 온다. 그 중에는 모든 걸 다 주겠다고 다가오다가 그친 사랑이 적잖을 거다. 그렇게 사랑을 주었음에도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돌변한 경우도 있다. 별로 사랑해주지 못했는데 한결같이 잘 해주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의 사랑은 동료애 같은 사회 보편적 사랑이라 해도 괜찮겠다. 당연히 당사자의 현실적 지위 변동이나 사회적 역할과 연동한다. 헌신적이고 일방적인 종교적 사랑은 아니다. 뜬금없이 지위나 구실, 나이를 떠나 찾아오는 사랑도 있다. 이는 고마우나 버겁다.

 올 마지막 달이 되니 해를 넘기지 않으려는 듯 청첩 받은 결혼 행사가 상당하다. 이제 나에게는 언제부턴가 부고장보다 청첩장이 더 많이 온다. 격세지감이다. 친부모님 처부모님 다 돌아가셨으니 고애자다. 때로는 밀려오는 그리움을 종잡을 수 없다. 피안에 계신 선대 어른들이 주신 내리사랑이 온몸을 감싼다. 현직을 떠난 뒤 벽에 걸어둔 선비(先비)의 사진을 뵐 때면 더 사무친다. 제 자식에 대한 사랑의 강도는 말로 하기 힘들다. 기대만큼 집에 잘 오지 못하거나 안부통화도 쉽지않은 자식들을 대하면서 나도 젊었을 때 그랬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저린다.

 또 한 해가 끝나간다. 작은 설날인 올 애동지도 지났다. 이해가 가기 전에 서로 용서를 빌거나 하면 좋겠다. 사랑해도 모자랄 판에 척을 지고 살지 않으면 낫겠다. 항도 부산에는 선지 핏빛 동백이 지금도 필 것이다. 충주 수안보는 온 산골이 순백의 만설로 다 젖을 것이다. 사랑은 만설로도 젖고 동백꽃으로도 핀다. 연말연시 자필로 정성껏 쓴 사랑의 연하카드는 점점 아날로그의 압화로 남겠다. 카카오톡 인사가 많을 게다. 이 세상 누구나 자기만의 애틋한 사랑이 있을 것이다. 아련한 그리움으로 찍힌 그리메 사랑, 이제 다시 봄볕처럼 피어나면 좋겠다.

 연말마다 되뇌는 말 다사다난! 제천 화마의 상처는 깊다. 치유에 절실한 것은 아가페로도 모자란다. 얼마 전 대통령 방중 때, 저 크나컸던 고조선의 후예임을 방과한 채 스스로 작은 나라라고 했다면 께름칙하다. 작은 모래알 한 톨이라도 귀하지 않은 게 없다. 모래알마저 떳떳이 설 때 서로가 사랑으로 잘 보듬을 수 있겠다. 정유년 붉은 닭은 또 한 해의 깃을 접는데, 한가로운 말을 늘어놓았으니 이야말로 한담만문이 아닌가. 자작 시조로 마감한다.

 모래알 한 톨인들 / 무심결에 생겼으랴 ∥ 비바람에 쓸려 밀려 / 떠나온 길 텅 비어도 ∥ 한 굽이 / 한 굽이마다 / 재려하면 잴 수 없네.
 - <모새>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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