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인천대 외래교수.jpg
▲ 김호림 칼럼니스트
이 땅에서 어느 때인들 태평성대가 지속됐으랴마는 2017년의 한 해는 우리를 내우외환의 어두운 그림자에 가두어 놓은 채 이제 저무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혹자들은 지난 2천500년 동안 우리 민족이 크고 작은 외침을 받은 횟수가 993회로 헤아리기도 하고 더러는 크게 보아 90회 정도라고 주장도 한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지 못한 시인 조지훈은 ‘봉황수(鳳凰愁)’란 시에서 사대주의로 큰 나라를 섬기다가 몰락한 조선왕조의 퇴락한 고궁을 보면서 망국의 슬픔과 비애를 노래했다. 왜 조선의 지배계급과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자처하며 공허한 주자학과 명분뿐인 당파싸움에 매몰돼, 부국강병의 국가경영에는 무력했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사대주의 유전자는 계속된다. 1881년 고종16년에 이만손을 중심으로 하는 유생들이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해서 올린 상소문 만인소(萬人疏)를 보면 "황준헌의 ‘조선책략’에는 중국, 미국, 일본과 손을 잡고 러시아를 견제하라고 하나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중국은 친밀한 나라이나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와 원수지간이고, 미국은 모르는 나라이며 러시아는 경계해야 할 필요가 없는 나라이다. 이런 내용의 책을 읽으라고 하니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라는 황당한 주장이 나온다.

 과연 중국은 역사적으로 우리와 친밀한 나라였고 신뢰할 수 있는 나라인가? 지난 11월 9일자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한국은 중국과 친해지려 하나 껄끄러움이 남아 있고, 트럼프와 시진핑 중에서 선택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라는 기사는 중국외교 전략의 민낯을 보여주는 섬뜩함이었다. 그 주간지가 표현한 중국의 외교 전략은 ‘가학적 접근방식’(doghouse approach)이다. ‘중국은 상대방 행동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길들여질 때까지 괴롭힌다. 만일 변화를 거부하면 개집에 가둬두는 벌을 가한다. 그래도 변하지 않으면, 적절한 시간 동안 체벌을 가한 후 개집에서 꺼내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면서 상대가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도록 바란다’는 것이다.

 실제 사드배치 이후 중국이 우리에게 가한 일련의 경제보복은 그들이 과연 국제법과 질서를 따르는 보통국가인지 의심스럽다. 중국은 북핵으로 인한 우리의 실제적인 위협보다 자국 중심 이익을 상위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사드문제는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 탈주행보를 방조하고 유엔제재로부터 북한을 보호해 온 책임을 이코노미스트지는 상기시켰다. 이 기사는 이번 가을에 대흥행한 ‘남한산성’이라는 우리 영화를 소개하면서, 명나라에 충성을 바쳐 대의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척화파와, 굴욕을 견디고 떠오르는 나라인 청을 인정해, 전쟁을 피해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주화파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조의 딜레마에 현재의 미·중 두 나라를 오버랩시켜 ‘몰락해가는 명나라가 미국인가? 떠오르는 청나라가 중국공산당인가?’라는 물음으로 역사란 되풀이될 수 있음을 깨우쳐주며 끝을 맺는다.

 이코노미스트지가 예견했듯이 대통령의 이번 중국 국빈방문은 저들의 일관된 한국 길들이기 외교 덫에 걸려든 것으로 보인다. 밥 먹는 문제부터 기자단 폭행사건에 이르기까지 주권국가로서 차마 거론하기 부끄러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쩌면 이런 불행은 이 정부가 초래한 것인지 모른다. 통일포기, 전쟁불가 선언, 한미동맹 약화, 사드배치의 중국눈치보기, 민주당 의원들의 사대주의 발언과 3불정책 등 우리의 카드를 미리 다 보여줬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힘없는 나라는 결코 상대방의 실질적인 협력을 얻어내지 못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증거했듯이, 중국으로부터 대북협력을 얻어 내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불안한 것은 이 정권의 정책 입안자들이 ‘만인소’와 같은 우둔함을 되풀이하지 않나하는 우려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미·일의 신뢰를 잃고 중국은 한국인의 마음을 잃었다는 어느 명예교수의 말은 적확한 표현이다. 중국은 아직도 우리를 속국으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 우리 중 일부는 그들을 선한 이웃으로 여기는 불안한 관계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미국이 그리 쉽게 지는 해가 아니라는 것과 ‘중국몽’이란 여러 상황으로 보아 일장춘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기회가 있으면 우리에게 불편한 이웃이 되려고 하는 것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이 땅에 굴욕의 역사를 초래한 무능한 인조는 이제 그만 등장해야 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