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같이 평범한 사람 얘기도 기삿거리가 되나요? 주변에 훌륭한 분들이 많을텐데 왜 하필 저를 인터뷰 하시려는지 쑥스러워 말을 못하겠어요."

지난 22일 오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2동 주민자치센터 3층 사무실에서 만난 이금자(여·60) 주민자치위원은 60갑자를 한 바퀴 경험하신 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수줍음 많은 ‘소녀’였다. 그의 나이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면 결례를 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동장의 설득과 풍덕천2동 줌마렐라축구단 주장 김정례(50)씨의 ‘지원 사격’ 덕에 간신히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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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시 풍덕천2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이금자 씨가 홀몸 어르신들에게 전달할 도시락 만두를 정성스럽게 빚다 잠시 짬을 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홍승남 기자 nam1432@kihoilbo.co.kr
그는 1955년생부터 1963년생까지 길게 늘어서 있는 베이비붐 세대의 중심에 자리잡은 그 유명한 ‘58년 개띠’다. 그나 기자나 왜 그들 세대에게만 유일하게 띠 앞에 출생 연도가 한몸처럼 붙어 다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그야말로 ‘개처럼’ 열심히 살아온 전후 세대의 주역이었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생존 경쟁이 그 어느 세대보다 치열했다.

가부장제 중심의 가족제도 속에서 하고픈 말을 못하고 일을 못했던 그때 그 시절. 초등학교(옛 국민학교) 당시 친구와 함께 쓰는 책상 한가운데는 어김없이 칼로 그은 ‘분단선’이 시대 상황을 대변했던 그 시절. 중학교에 진학하고서는 밤을 새워가며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줄줄 외워야 했던 그 시절. 오후 5시가 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국기 하강식에 맞춰 걸음을 멈추고 관공서에 내걸린 국기를 향해 오른 손을 왼쪽 가슴에 얹어야 했던 그 시절. 영화 관람 전에는 반드시 ‘○○○ 대통령은…’으로 시작하는 대한뉴스를 시청해야 했고, 두발은 한결같이 단발머리를 유지해야 했던 그 시절. 남고생, 여고생을 막론하고 피해갈 수 없었던 교련실기 대회를 준비하느라 가슴 졸여야 했던 그 시절.

그 역시 이런 시대의 중심을 관통하고 살아왔지만 동시대인이 겪은 공통 분모여서인지 돌이켜보면 특별히 기억나는 어려움은 없었단다.

다만, 그는 결혼 이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다가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해외 주재원으로 발령나면서 남편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10여 년간 이국생활을 해야 했던 시기가 기억의 중심에 똬리를 틀고 있다. 처음 일본으로 출국할 때 첫 째는 세살배기, 둘 째는 갓 돌을 넘긴 시기였다. 5년 만에 귀국했지만 이내 또다시 짐을 챙겨 캐나다로 날아갔다.

간간이 찾아오는 향수병으로 힘든 시기도 없지 않았지만 세심하고 자상한 남편의 배려로 무탈하게 임무를 완수하고 1999년 귀국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귀국 이후였다. 외국 생활보다 한국 생활이 되레 적응하기 힘들었다. 갑작스레 바뀐 교육환경은 두 아들에게도 혼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용케도 두 아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난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갔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약대에 진학해 현재 형(35)과 아우(32) 모두 약사로 활동하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외국을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면서 ‘빨간 십자가가 저리도 많은데, 세상은 왜 점점 각박해지는 것일까’ 하며 무시로 상념에 젖곤 했다. 종교생활을 통해 낮아지는 법을 체득한데다 늘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는 2004년 노숙인들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후 용인으로 이사 오기 전인 2009년까지 거주지인 대치동에서 영등포를 오가며 노숙자들의 끼니를 책임지는 무료급식 자원봉사자로 묵묵히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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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그의 타고난 ‘봉사DNA’는 꿈틀거렸다. 풍덕천2동 주민자치센터 사회봉사분과의 문을 두드렸다. 홀몸노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 장애인 등에게 밑반찬을 만들어 배달하는 일을 맡았다. 그를 비롯한 봉사자들은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 새벽이면 어김없이 주민자치센터 지하 1층에 있는 주방에 모인다. 사전 선호도 조사를 통해 준비한 식재료에다 ‘사랑과 정성’이라는 양념을 곁들여 3가지 밑반찬을 조리한다. 수혜 대상은 15가구다. 설·추석 명절이나 보름, 동지, 복날 등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에는 거기에 걸맞게 메뉴를 달리한다. 이런 날은 떡국이나 송편, 삼계탕, 팥죽 등이 밑반찬을 대신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단순히 밑반찬이나 음식을 배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의 건강을 살피고 말벗이 돼 드리는 일은 그의 생활이 되다시피 했다. 이 같은 그들의 숨은 봉사활동은 풍덕천2동 주민자치센터가 2015년 ‘제43회 어버이날’을 맞아 효행실천 및 노인복지 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도지사상을 수상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는 4년여 전부터 주민자치위원을 맡으면서 봉사활동의 범위를 넓혀 나가고 있다. 밑반찬 만들기 봉사활동이 없는 날에도 일주일에 3∼4일은 주민자치센터가 그의 생활 터전이다.

‘전업주부’라는 한 가지 ‘직업’만 고집했던 그에게 주민자치센터는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가정과 사회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되돌려 주는 공간이다.

주민자치센터 프로그램 수강자들의 애로사항을 챙기고, 전화상담 등을 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노사연의 ‘만남’을 즐겨 부른다는 그는 올해 회갑을 맞아 순수하고 보석 같은 시·공간을 함께했던 친구들과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는 멋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언제 어디든 달려갈 겁니다. 거창한 봉사단체에 들어가 조명을 받기보다는 타인에게 먼저 미소 짓고, 양보하고, 배려하며, 역지사지의 자세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우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두 아들에게 입버릇처럼 하고 살았다는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라’는 말을 그 스스로 실천하고 있었다. 

 용인=우승오 기자 bison88@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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