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이 땅에 프로야구가 태동한 이래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팀들이 인천을 거쳐 갔다. 많은 야구 스타들도 명멸(明滅)해 갔다. 이들 가운데 인호봉(60) 씨는 인천 출신의 토종 에이스로 불린다. 프로야구 원년 지역 연고팀 ‘삼미 슈퍼스타즈’ 최고의 간판 투수였다. ‘만년 꼴찌팀’이라는 조롱과 함께 지금은 흐릿한 기억 너머의 선수가 됐다.

하지만 그를 향한 올드 팬들의 진한 향수(鄕愁)는 여전히 유효하다. 마운드에 올라 140㎞를 넘나드는 강력한 속구를 뿌리던 건강한 청년은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중년이 됐다. 눈빛은 여전히 또렷했다. 주먹 쥔 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는 인천에서 태어나 60년을 살아왔다. 야구공을 처음 잡았던 어린시절부터 부동산 컨설턴트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까지 ‘어느 위치에 있건 후회 없이 살자’라는 신념을 가슴속에 품어 왔다. 인천시 중구 신흥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야구 글러브를 잡았다. 당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며 ‘돌 멀리 던지기’ 놀이를 잘했다.

그는 체육에 소질이 있어 5학년 야구부 선배들에게 ‘강압적’ 제의를 받아 야구부에 들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유소년 스포츠 활동’이라는 말이 없었던 시기였어요. 달리기 잘하고 싸움 잘하면 운동부에 가입할 수 있었죠.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무작정 뛰어 들었던 것 같아요." 그의 야구부 입성 당시의 소회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는 소년체전을 비롯한 시·도 대항전과 전국대회 등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다. 투수와 타자 등 모든 포지션을 소화해야 하는 아마추어 야구 무대에서도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최고 투수상과 최고 타자상, 도루상, 출루상 등 4관왕을 모두 거머쥘 때도 있었다. 지역 야구 명문인 상인천중학교를 거쳐 인천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현재 NC 다이노스 코치로 재직 중인 양승관 씨와 함께 인천고를 이끌며 전국 고교 야구계를 호령했다.

"14타자 연속 삼진 기록과 함께 봉황대기 선수권대회에서 40이닝 무실점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투수를 꿈꾸던 시기였죠."

인하대를 거쳐 실업야구팀 한국전력에 입단한 그는 프로야구 창설을 앞둔 1981년 ‘삼미 슈퍼스타즈’에 스카웃됐다.

"당시 인천시민회관에서 화려하게 창단식을 했었죠. 실업야구에서 받지 못한 계약금과 연봉도 받았습니다. 정말 ‘프로 무대’라는 것이 실감이 났었죠."

팀 창단 후 개막 직전까지 연습 경기에서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등 기세가 높았다.

"그 당시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던 OB를 상대로 선발 출장해 승리를 거뒀죠. 허름한 숙소에서 먹고 자며 승리를 향해 투지를 불태웠던 옛 동료들이 너무 그립습니다."

해가 바뀐 1982년 3월 한국프로야구가 개막했다. 함께 출범한 타 지역 연고팀은 막강했다. 대학 야구와 국가대표를 거친 선수를 다수 보유한 팀도 있었다. 그러나 ‘삼미 슈퍼스타즈’는 고교 야구 출신이 대부분인 약체팀이었다. 첫해 6팀 중 최하위의 전력으로 시작했다. 그는 선발과 중간 계투, 마무리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투수로 활약했다.

"오로지 달리고 던지고 잡고 치는 것이 훈련의 대부분이었어요. 요즘 야구하는 후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좀 더 오래 하지 못하고 은퇴한 아쉬움도 많이 남죠."

▲ 선수 시절 활동 모습.
그는 그해 ‘삼미 슈퍼스타즈’에 원년 첫 승을 안겼다. 생애 가장 기쁘고 가슴 벅찼던 순간을 1982년 3월 28일 대구 구장에서 열린 삼성과의 개막 경기로 꼽았다. 그는 경북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투수 황규봉과 ‘헐크’ 이만수 등을 상대로 역투를 펼쳐 완투승을 거뒀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기 리그 10승 30패, 후기 리그 5승 35패로 시즌 최저 승률 1할8푼8리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좌절의 나날들이 계속됐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입에 거품을 물고 코피를 수도 없이 쏟을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 도원역 근처에 있던 어묵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고 남은 어묵을 얻어다가 먹으며 밤샘 훈련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듬해 ‘삼미 슈퍼스타즈’는 ‘너구리’ 장명부와 임호균을 영입해 전기 리그 2위라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갔다.

"83시즌부터 선발 출장 횟수가 줄어들고 중간 계투와 마무리를 오고 갔어요. 1985년 ‘삼미 슈퍼스타즈’가 청보에 매각될 때 즈음 조용히 은퇴했습니다. 타 지역 연고팀에 가서 선수 생명을 이어갈까도 했지만,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옷을 벗었습니다." 그후 은행원으로 변신했다. 늦깎이로 업무를 배우고 실적을 쌓기 위해 매일같이 공부하고 뛰어 다녔다.

"무식한 운동선수라고 놀리는 선배들한테 지지 않기 위해 닥치는 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어느 위치에 있건 후회 없이 사는 것이 제가 지닌 삶의 철학이었으니까요. 낯선 사회생활에 참 많이 울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네요."

1990년대를 지나 2000년 초까지 은행원으로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삼미 슈퍼스타즈’ 내야수였던 장정기의 제의로 인천에 위치한 PDP 패널 생산회사에 들어갔다. 일반 사원으로 시작해 2010년께 공장 사장직까지 올랐다. "5년 전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자 그만둘 때까지 회사를 우량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수주를 따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직원들과 함께 누비던 기억도 있고요." 그는 프로야구 원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에이스부터 은행원, 중소기업 사장 등을 거쳐 부동산 컨설턴트에 이르는 삶을 사는 동안, 어린 시절부터 품어 왔던 ‘최선’이라는 단어를 놓지 않았다. 2018년 개의 해를 맞아 1958년생 개띠인 그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 온 동년배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 단체사진.
"이제는 우리 나이가 일선에서 은퇴를 하는 시기예요. 자신감도 권위도 떨어지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삶이 끝난 것이 아니죠.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삶은 계속됩니다. 나이가 적건 많건 간에 자신의 위치에서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게 인생 아닐까요." 그는 자신의 인생 계획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나이가 들어 지금 건강이 썩 좋지 못해요.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즐기며 살고 싶어요. 다행히 부동산 중개업은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직업이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과 실패, 치열한 경쟁을 떠나 내가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야죠. 젊은 날 가슴에 묻은 추억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져보고 싶은 조그만 꿈도 있네요."

우제성 기자 wjs@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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