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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연 수필가
흑백텔레비전 시절의 만화영화가 떠오릅니다. 겉모습이 인간들과 똑같아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내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츰 성장하면서 친구들과 다른 자신을 발견합니다. 기쁨과 슬픔을 맛보았을 때 친구들의 눈가엔 뜨거운 감동의 눈물이 흘렀지만 그녀의 눈에선 차가운 물방울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뛰어 놀다 다쳤을 땐 뜨거운 피가 흘렀지만 그녀의 상처에선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외로움과 불안이 엄습해 왔습니다. 궁금증을 풀고 싶었던 소녀는 자신의 팔목을 칼로 그어 깊은 상처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녀의 피부 속에는 뜨거운 피가 아닌 복잡한 전선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순간, 자신은 인간이 아니고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전자 제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깨를 추썩거리며 눈물 없는 오열을 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눈물이란 눈동자 위의 누선에서 나오는 체액으로 가슴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감동만이 빚어낼 수 있습니다.

어느 해, 무더운 여름밤을 온통 눈물 홍수에 잠기게 했던 텔레비전 방송이 있었습니다. 이산가족들의 오열을 우리 모두의 슬픔으로 동감하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귀에 익은 말을 실감한 방송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고 잘못을 용서함은 뜨거운 피와 눈물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이해심 없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을 가리켜 냉혈동물이라고 몰아붙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각박하다는 이유만으로 피와 눈물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듯합니다. 번잡한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뒤쫓거나 폭력배들에게 폭행을 당해도 모두가 관심 밖일 뿐입니다. 볼썽사납고 부도덕한 행실을 나무라면 안하무인으로 대들기 일쑤요, 내 자식 같은 안쓰러움에 회초리를 들면 오히려 폭행죄로 고소당하는 세태이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보고 윗저고리를 벗어 던지는 피 끓는 의협심은 신파극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전의 주먹들은 인정과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최소한의 양심은 간직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피와 눈물이 있는 사나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가정 파괴범, 인신 매매단의 행각은 글자 그대로 냉혈 동물과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녀를 학대하는 것도 부족해 암매장하는 비정한 부모도 있습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그들의 피와 눈물은 모조 인간 로봇 소녀의 내부에 장치된 전자 부품만도 못할 것입니다.

피는 향기가 없지만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간직한 한 송이 빨간 장미입니다. 장미가 그 빛을 잃으면 낙화하듯 차가운 피는 몸과 마음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눈물은 수줍은 촌색시의 발그레한 볼만큼이나 순박한 감정의 산물입니다. 때문에 눈물이 보이지 않는 통곡은 슬픔보다 청각의 피로감을 더할 뿐입니다. 진실한 눈물방울은 햇살에 반사되는 영롱한 아침 이슬보다 더 고아한 자태와 가슴 설레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두 볼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불결한 액체로 비하한 표현은 하나도 없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며 거울이라고 합니다. 거울에 비친 눈물 그렁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노라면 잊었던 자아를 반성하게 됩니다. 아직 나의 눈물은 추악한 세태에 오염되어 있지 않았는지, 뜨거운 만큼의 진솔한 사랑을 저 하늘의 별들과 두런두런 나눌 수 있을지….

상처에 흐르는 분홍빛 피를 닦을 때면 피와 눈물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 준 로봇 소녀에게 감사함을 느낍니다. 피와 눈물! 그것은 생명이 숨 쉬는 동안 이어지는 영원한 인정의 샘물입니다. 요즘 언론에 회자되는 정치인들의 눈물을 지켜볼 때마다 텔레비전 만화의 주인공 로봇 소녀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순수한 눈물은 진솔한 감정의 메아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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