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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신년 연휴 기간 중 뒤늦게 TV로 영화 ‘남한산성’을 봤다. 이 영화는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과 신하들이 남한산성에 피신해 지내던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신하들은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했고, 민초들은 공포와 추위와 배고픔으로 온 몸을 떨어야 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지난 5천 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침을 당하며 우리 민족이 겪어온 고초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정학적 여건으로 인해 국제정세 변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는 상황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엇비슷하다.

지난해 9월 7일(현지시간) 맨부커상 수상자인 소설가 한강은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 ‘승리로 끝나는 전쟁 시나리오는 없다(There is no war scenario that ends in victory)’는 제목의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전쟁이 임박해 보이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한국의 상황을 신비하게 여기는 외국인들에게 "겉은 평온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수십 년 동안 축적돼 온 긴장과 공포가 우리 내부 깊은 곳에서 파문을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우리 국민의 전쟁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와 평화에 대한 절절한 갈구를 문학가의 정제된 언어로 잘 표현했다고 본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긴박하게 진행되던 긴장 정세가 최근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용의 표명을 기점으로 다소 완화된 상황이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종래 강경 발언을 내놓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지난 6일(현지 시각) "(남북대화를) 100% 지지한다"며 "(내가) 북한 김정은과 통화할 수도 있다"고 말했고, 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이 본격적인 비핵화 협상에 나오길 바란다는 뜻을 표명하기도 했다. 부디 남북한 간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논의를 계기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정세가 평화의 국면으로 반전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 국가와 민족에게 ‘평화’라는 말처럼 절실한 단어는 없기 때문이다.

명칭이야 ‘한반도 운전자론’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국가와 민족의 운명의 향방을 주변 강대국들의 ‘처분’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남북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잘 한 일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5일 "강력한 국방력을 기반으로 대화를 추진하고 평화도 추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당연한 말이다. 강력한 국방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평화를 위한 노력은 실효를 거두기가 지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다 근원적이고 지속가능한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강력한 국방력 확충뿐만 아니라 강대국들에게 우리의 입장을 납득시키고 관철시켜 나갈 유능한 외교인력 확충도 필요하다. 특히 국제법에 정통한 외교전문가를 적극 육성해야 한다. 국가의 힘은 군사력에 의해 뒷받침되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힘은 합리적 설득력과 정연한 국제법적 규범논리에서 나온다. 고려시대인 993년(성종 12년) 거란족의 침략을 당해 국운이 위태로워졌을 때 전쟁의 확산을 막아내고 국토 확장의 실리까지 얻어냈던 서희의 담판과 같은 외교적 성공사례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남북 간, 한미 간, 한중 간, 한일 간 문제 등 산적한 통일·외교적 현안들을 슬기롭게 풀어나가기 위해 유능한 외교 전문인력 특히 국제법 전문가들을 많이 양성해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우수인재들은 지나치게 ‘돈이 되는 공부’에만 몰리고 있다. 우수 인재들을 ‘(개인적으로 별로 돈이 안 되지만)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공부’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올림픽 출전 선수를 지원하듯 전폭적인 국가 지원이 필요하다. 국비로 외국 유학을 보내 국제관계와 국제법 등 폭넓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대폭 확대하는 등 체계적으로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전쟁을 거부할 권리’, ‘전쟁에 휘말리지 않을 권리’에 대한 국제법적 연구도 필요하다.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의 사례도 장기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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