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불씨를 지피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평범한 영웅은 영화 속 교도관으로 그려진 한재동(72)씨다. 한 씨는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궤변으로 잘 알려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린 이다. 지금은 약 34년의 교정직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고 경인교육대학교 조경 담당으로 재직 중이다.
올해 들어 가장 추웠던 지난 11일, 경인교대 체육관 한 쪽의 작은 사무실에서 그는 30여 년 전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더듬는다. 1947년 7월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한 씨는 군 전역 후 1971년 교정직 공무원에 첫 발을 디뎠다. 그는 열악한 교정 환경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 경주, 김천 등의 지방 교도소를 떠돌았다. 1975년 지방 근무를 마치고 자리를 옮긴 서울구치소에서 자유언론 투쟁을 하다 수감된 이부영(75)씨를 처음 만났다. 그 후 한 씨는 1984년 영등포교도소로 자리를 옮겼고, 1986년 5·3 인천사태의 배후로 지목돼 구속된 이 씨와 재회했다.
1987년 1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 군이 사망하면서 치안본부는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다. 사건을 축소·은폐 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공작이었지만 진실은 덮여지지 않았다. 당시 또 한 명의 교도관이 진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씨의 상사였던 안유(74) 보안계장은 영등포교도소를 방문한 치안본부 간부들에게 고문 가담자는 따로 있다고 항의하는 경찰관들의 모습과 거액으로 회유하려는 간부들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이부영 에게 알렸다. 안 씨에게서 사실을 전해들은 이 씨는 사건의 전말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모든 진상을 쪽지에 기록해 다음 날 한 씨에게 전달한다.
"형이 쪽지를 건네며 발각되면 우리 모두 죽는다고 말했지만, 애초부터 목숨을 걸고 시작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어요."
쪽지에 담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은 ‘비둘기’ 한 씨를 통해 당시 재야 운동가였던 김정남(75)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게 전해졌다. 그렇게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은 그 해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 미사’를 통해 전국에 공표됐다. 이는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고 ‘6·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 낸 계기가 됐다.
"공무원은 국민에게 충성하는 것이지, 정권에 충성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나의 신념이었지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독재에 맞선 사람들을 보면서 양심에 따라 행동했을 뿐입니다."
우제성 기자 wjs@kihoilbo.co.kr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키워드
#한재동 씨
우제성 기자
wjs@kiho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