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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남현 인천시 계양공원사업소 녹화지원팀장
고구려 무용총에는 범과 사슴을 사냥하는 수렵도(5∼6C)가 그려져 있고, 조선말기 이인문의 수렵도(18C)와 유숙의 호도(19C)에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한반도에서 범과 표범은 최상위 포식자로서 17세기 초까지 매년 1천 마리 이상이 사냥될 정도로 개체수가 많았지만, 20세기 후반에 멸종됐다. 한반도에 서식하는 사슴은 대록(大鹿)과 꽃사슴이 있었는데, 대록은 16세기 이후에 그 수가 급격히 줄었고, 꽃사슴은 17세기 이후에 거의 사라졌다. 18세기 이후에는 백두산 일부 지역에서만 간간히 사슴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한 가축으로는 소와 말이었다. 소는 농사일과 고기를 얻는데 중요했고, 말은 군사와 교통 면에서 중요했다. 국가에서 말 목장을 운영하는 등 집중 관리했는데, 많을 때는 10만 마리까지 이르렀다가 적을 때는 3천 마리로 줄어들었다. 최근에는 승마레저 붐에 힘입어 2만 마리가량이 유지되고 있다. 소는 농사 짓는데 필수적이었음에도 세종 대에는 3만 마리에 불과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110만 마리가량으로 늘었다. 한국의 소는 세조 대에 오키나와에서 도입된 물소의 후손들과 교배되면서 덩치와 힘이 2배로 커지게 됐고, 논밭을 가는 능력과 속도는 4배쯤 빨라진 우량종으로 개량됐다. 조선의 육종기술로 오늘날의 위대한 ‘한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소의 힘으로 농사를 짓게 된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었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조선의 통치 이념에 따라 식량을 가장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지향했다. 사람들은 산림천택(山林川澤)의 야생 공간을 가용공간으로 늘려 나갔다. 소를 이끌고 야생의 공간에서 농경지를 마련해야 했다. 가용공간을 확장하는 것은 한반도 야생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인 범과 표범에 맞서는 일이었다. 개간으로 인해 사람과 소가 호랑이에 물려 죽는 호환(虎患)의 피해가 심각했다. 호랑이의 입장에서는 사슴이라는 먹잇감 감소와 서식공간이 축소되는 생존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서식 영역을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호환의 피해로 고통을 받게 되자 전면적으로 포호(捕虎) 활동을 벌이게 된다. 범과 표범을 사냥하는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전문 군사도 양성 운영했고, 포호정책의 성과를 확인하고 강제하기 위해 모든 고을에 매년 3장씩의 호피와 표피를 바치게 했다. 17세기에는 호랑이와 표범을 잡지 못해 가죽을 바치지 못하는 고을에 가죽값에 상응하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호속목(虎贖木) 제도도 시행했다. 호피에 대한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당시 한반도에 살았던 범과 표범의 개체 수는 4천~6천여 마리였음을 알 수 있다. 호랑이와 표범의 개체수가 한반도에 그렇게 많이 서식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당시만 해도 한반도에 펼쳐진 산림천택의 자연생태 환경이 매우 건전했음을 말해주는 반증이다.

 조선왕조실록에 호환(虎患)에 관한 기록이 여러 번 나오는데, 숙종28년(1702) "各道虎患, 實爲生民之害. 臣聞胡人, 長事田獵, 故猛獸避來我境云(각도의 호환은 실로 백성들의 해가 됩니다… 호인이 늘 사냥을 일삼기 때문에 사나운 짐승이 우리나라의 경계를 피해서 온다 하니)." 이 기록에서 호랑이가 백두대간을 따라 한반도에 유입됐음을 알 수 있다. 인천지역과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이는 기록으로는 영조9년(1733)에 "畿甸沿海之邑…延安, 白川之野…虎患甚熾(경기연안지방 대낮에 호표가 들에 있으니), "영조41년(1765)에 "江華府…吉祥牧場…場內虎患之發…最是牧場虎患, 馬種將絶可悶(강화 길상목장 안에서 호환이 발생하여 종마가 없어지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니)." 당시 호랑이가 백두대간으로 내려와 한남정맥을 따라 함봉산, 원적산, 계양산을 거쳐 문수산에서 바다를 건너 강화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 호랑이가 왕래했던 한남정맥 줄기에 있는 함봉산과 원적산 숲속에 인천 녹지축 생태환경을 알릴 수 있는 인천동물원을 만들어 보자. 함봉산은 옛날에 산림이 울창해 호랑이 소리가 나는 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당시 호랑이는 인천 한남정맥의 산림과 무너미 숲이 울창해 먹잇감이 풍부했던 부평 들녘을 한껏 넘나들었을 것이다. 인천 동물원을 만들어 호랑이가 포효하던 한남정맥의 기상이 담긴 인천 호랑이의 생태환경에 관한 역사성을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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