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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섭 인천시 지방부이사관

고령사회가 축복인지 재앙인지에 대해서는 관점도 해석도 각각이지만 뚜렷한 현상 중 하나는 조손가정의 증가다. 현대사회가 초래하는 수많은 위험으로 인해 중간세대가 사망하는 경우에 남겨진 손자손녀와 예전보다 오래 살게 된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릴 적에 그러니까 돌 지나고 얼마 후부터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너무 일찍 청상이 된 할머니와 시골에서 살았다. 부모님은 당시 우리나라에 몰아치던 산업화와 이촌향도의 커다란 흐름을 따라 도시로 떠나 자수성가를 위해 애쓰던 터였다.

 내 경우를 전형적인 조손가정이었다 할 순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한 세대 위의 온축된 삶의 지혜를 본받고 터득한다는 면에서 조부모의 그늘은 무척이나 값진 것이라 할 만하다. 흔히 한 치 건넌 내리사랑만큼 무조건적이며 무한한 게 없다고 하고 그래서 조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버릇없다고도 하는데, 그런 면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틀린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 기억도 흐려가지만 그때에야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좀 후에 수돗물이 나오게 되었고 또 좀 후에 버스가 비포장 신작로를 다니게 되었는데 내겐 참 경이로운 경험들이었다. 책가방 대신 책보를 어깨와 허리에 가로질러 매고 십리 가까운 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고, 또 십리 길을 뛰어 먼 마을에 텔레비전 있는 집을 다녀왔던 밤도 기억난다. 당시에도 의식주가 넉넉지 않았던 시골치고는 그래도 밥걱정 없는 형편이었음에도 할머니는 노란 좁쌀을 많이 섞은 밥을 지어 당신은 노란 밥을 손자에게는 흰 밥을 차려 주셨다. 매일 아침 헛간 짚더미에서 갓 낳은 따뜻한 달걀을 가져다 노랗게 쪄 밥상에 올려 주셨고 어물 귀한 산골 마을 오일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명태새끼를 축으로 사 와서 한 마리씩 다듬이 방망이로 두들겨 부드럽게 해서는 구워 주시곤 하셨다. 손수 조청을 고고 감주를 뜨시고 인절미며 시루떡을 만들어 주셨는데 어지간히 호강스러운 어린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이토록 극진했을 뿐만 아니라 타인, 이방인에 대한 환대(歡待)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셨다. 할머니 집은 신작로에서 마을 어귀에 첫 집이었고 대문도 없었다. 당시에는 멀리서 장을 보고 밤늦게 마을을 지나던 장꾼이나 각종 방물을 파는 장수들이며 탁발하는 스님에 구걸하는 동냥아치들도 많았는데 할머니는 한 번도 이들을 문전박대한 적이 없었다. 물을 대접하고 밥을 대접하고 여인네는 재워주기도 했다. 이런 기억의 장면들을 재발견하는 곳은 요즘 텔레비전에서 세계를 여행하고 소개하는 몇몇 프로그램이다. 여기 등장하는 세계 곳곳의 사람들은 먼 곳에서 온 낯선 이방인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언제나 환대한다. 벽지오지 사람들이 너나없이 그렇고 곤궁한 처지 사람들이 더 극진하다. 자신들이 먹을 빵 한 조각이나 우유 한 잔을 기꺼이 나누려 하고, 좁은 집 한 편에 이방인이 몸 뉘일 자리로 내놓는다. 이방인의 정리(定離)를 알면서도 막상 떠날 땐 그 짧은 인연의 정리(情理)를 그들은 늘 애틋해 한다. 이런 모습은 우리 고향의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을 쏙 빼닮았다. 불과 한 세대 전 우리 시골이 그러했다.

 할머니의 대문 없는 마당은 마을에서 제일 먼저 멍석이 펴지는 곳이었고 밤마실의 목적지였다. 할머니와 어린 손자가 함께 쓰던 넓지 않은 방 하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동네엔 청상의 신산함을 함께 겪은 할머니들이 꽤 많았는데 이들이 밤늦도록 구석구석 차고 앉아서 풀어내는 끝도 없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상상력을 마구마구 동원하곤 했다.

 지금 내가 다시금 때때로 할머니를 추억하는 까닭은 지극정성으로 베풀어주신 무한의 사랑 때문만이 아니다. 지금도 내 혀와 소화기관들에 뿌리처럼 굳건히 자리 잡은 그 구수하고 편안한 그리하여 내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던 음식들 때문도 아니다. 할머니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 그 대문 없던 집에서 몸소 깨우쳐 주셨던 정신과 태도, 사람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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