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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구 청운대학교 대학원장
모든 예술 행위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독특한 표현수단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문학은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어서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갖추고 있을 때 훌륭한 작가로 남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특히 시는 근본적으로 ‘은유(metaphor)’이기 때문에 시인의 언어감각이 무디면 적확한 표현을 찾아내기 어렵고, 때로는 생뚱맞거나 너무 진부한 표현을 하게 돼 실망감을 주기 쉽다. 시를 포함한 글쓰기의 어려움이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시인이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환영받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의 말처럼 ‘낮설게하기(defamiliarization)’를 실현하는 것이다. 늘 새롭게 표현해야 한다는 이 방법 앞에 시인들은 머리를 쥐어짜며 고뇌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이전과 다르게 바라보고 표현할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시를 쓰고, 많은 시집들이 발간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시와 시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어느 지역이라는 공간과 관련 지어 독자들에게 각인된 시인은 흔치 않다. 들뢰즈의 표현처럼 ‘유목민적(nomadic)’인 시대에 어느 지역의 공간을 예찬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인지 의문스럽지만, 19세기 영국 계관시인이었던 윌리암 워즈워스는 ‘호반시인’이라고 불릴 만큼 호숫가 근처에 살면서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는 시를 썼다. 20세기 초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을 배경으로 하여 주옥 같은 시를 써서 미국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 달 전쯤 개봉돼 상영되고 있는 독립영화 ‘패터슨’은 ‘윌리암 카롤로스 윌리암스’라는 시인의 삶과 지역공간의 상호 관련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 시인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영화 속에 이름이 스쳐 지나가는 ‘월러스 스티븐슨’과 함께 현대 미국시인으로 미국문학 교과서에 등장한다. 윌리암스의 대표적 시집이 『패터슨』이고 그가 살았던 동네의 이름도 뉴저지주의 ‘패터슨’이다. 『패터슨』이라는 시집은 ‘패터슨’이라는 동네의 이야기를 시로 담아낸 것이다. 윌리암스의 시의 특징은 ‘미국적인 것의 탐색’이라고 요약해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버스 운전수 패터슨은 틈이 날 때마다 떠오르는 시상들을 기록한다. 이 기록들은 T.S. 엘리엇이나 에즈라 파운드의 시처럼 고전에서 인용되는 ‘인유(allusion)’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패터슨이라는 동네의 일상들이다. 그래서 T.S. 엘리엇의 『황무지』처럼 낯설지 않다.

 영화 ‘패터슨’은 운전수 패터슨의 삶에 커다란 사건 없이 잔잔하게 전개된다. 패터슨이 아침마다 일어나 바라보는 아날로그 시계는 5분 정도의 차이를 나타낼 뿐이다. 그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패터슨의 부인도 통기타 가수가 되고 싶어 하고, 컵 케이크를 만들어 팔고 싶어 하지만 그녀의 열정은 거대도시에서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다. 23번 시내버스 운전수 패터슨에게는 휴전전화마저도 없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머리를 대신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운전수 패터슨은 자신만의 아날로그적인 삶을 구축하고, 매일 매일 시 쓰는 행위를 삶의 중심에 놓고 있다. 짐 자무쉬 감독은 패터슨의 지루한 일상을 그려내지만 그게 삶이 아닐까 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사물시(Dinggedicht)’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이 영화 속 여자 아이의 시 ‘물이 떨어진다(Water Falls)’에서 느껴지는 것은 짐 자무쉬 감독의 문학적 내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윌리암스는 낡고 진부한 언어, 상징들을 버리고 눈앞에 있는 사물들과 직접 ‘접촉(contact’)해 그 새로운 느낌을 언어화해야 한다는 시론(詩論)을 펼쳤다. ‘관념이 아닌 사물 속에서(No ideas but in things)’라는 그의 구호는 접촉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먹고 사는데 도움도 되지 않는 시를 삶의 중심에 놓고 선하게 살아가는 운전수 패터슨을 보면서 ‘문학은 무용하므로 유용하다’라던 故 김현의 말이 불현듯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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