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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계봉 시인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작가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존(야만인)과 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상징하는 무스타파 몬드(통제자) 간에 이루어지는 다음과 같은 대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는 여건을 안락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네." 통제자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하고,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야만인은 반항적으로 말했다.

 "저는 불행해질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합니다."

 헉슬리는 이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통제된 사회에서 누리는 제한된 자유와 개인의 자율적 의지가 선택하는 불행, 어느 것이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일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매트릭스’가 던지는 화두와도 다를 게 없다. 실재 현실보다 훨씬 아름답게 윤색된 가상공간 ‘매트릭스’에서 안락하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이 파괴돼 혹독하고 기괴하게 변한 2090년의 실재 현실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선택할 것인가?

 전자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인간 건전지’로 살아가야 하는 삶이고, 후자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대가로 혹독한 현실을 수용해야 하는 삶이다.

 물론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은 불교를 비롯한 동양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코웃음을 칠 일이다. 불교나 노장에서는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실은 꿈속의 공간 즉 가상공간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삶의 고뇌가 너무 고통스러워 누군가가 전자의 삶을 선택했다고 치자.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과연 있을까? 그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도 실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던가?

 고답적인 ‘죽림7현’이, 현실에서 비루하게 살아가는 걸인들을 보고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침을 뱉을 수 있는 일인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현실에 매몰된 사람이나 뭐가 그리 크게 다를 것인가? 적어도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한 주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그 선택 주체의 문제지 남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갈등과 대립은 신석기 문명 이후 오늘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행해질 권리,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모든 것이 획일화되고 체계화된 현대 문명에 대해 이 얼마나 신랄한 비판이자 문제 제기란 말인가? 이 말은 결코 마조히즘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건 어디까지나 풍자 혹은 반어일 테니까 말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와 통제는 그 어느 경우라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자유가 온전히 우리 것이라면, 죽을 자유, 불행해질 자유까지도 우리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존의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물론, 인간은 행복할 권리를 당위적으로 가진다. 그러나 그것이 위장된 평온함과 은밀하게 구획된 범주 안에서의 제한된 행복, 획일화된 행복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그 통제 범주를 깨뜨리기 위한 지난한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힘겹고 불행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옳지 않음과의 싸움에서 느끼는 힘겨움은 부조리함을 수용함으로써 시혜적으로 주어지는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 훨씬 비장한 행복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의 더욱 정교해진 순치 기제들은 오늘도 다양한 당의정 속에 정체를 숨긴 채 집요하고 은밀하게 우리를 현혹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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