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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시인

호주오픈 세계 테니스대회에서 보인 정현 선수의 쾌거가 문득 우리나라와 인천의 테니스 역사, 그 시초를 살펴보게 한다. 테니스가 우리나라에 선보인 것은 대략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로 알려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백과」는 우리나라에 테니스가 소개된 것이 미국인 선교사 뱅커와 제중원(濟衆院)의 앤더슨에 의해서였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테니스보다 일본인들에 의해 소개된 연식정구가 주로 행해졌으며, 정식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하여 테니스가 시작되기는 1926년 당시 경성제국대학 정구부장이었던 강성태가 연식정구부를 테니스부로 전환시키면서부터였다"도 붙이고 있다. 이 글에서 언뜻 느낄 수 있는 것이 테니스와 연식정구를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식정구에 대해서는 「체육학대사전」에 "딱딱한 볼을 사용하지 않고 말랑말랑한 고무공을 사용하여 하는 테니스를 말한다. 19세기 말경에 일본 사람들이 론 테니스의 용구난(用具難)과 값비싼 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경구(硬球) 대용품으로 고무공을 고안하여 이 공으로 테니스를 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 설명 중에 등장한 ‘경구’라는 용어가 곧 오늘날의 테니스를 의미하는데, 연식정구공에 비해 테니스공이 딱딱했기 때문에 단단하다는 뜻의 ‘硬’ 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었다. 또 테니스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데에 대해 ‘1927년 서울 용산철도국 코트에서 열린 제1회 테니스선수권대회가 시초’라는 기록과, 개항과 더불어 주한 초대 미국 공사 푸트(Foote)에 의해서라는 「신편한국사」의 설이 있다. 「신편한국사」는 "1884년 갑신정변 이전에 이미 미국 공사관 직원과 개화파 인사들은 테니스를 즐겼으며, 특히 김옥균은 화동의 자택에 홈코트를 만들어 외국 공사들과 시합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거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경기는 1909년 탁지부 관리들이 5월 2일 미창동(米倉洞) 정구코트에서 여흥 식 경기를 가진 것이었다"라는 내용도 곁들이고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테니스의 시초에 관한 기록들은 글마다 차이가 있지만, 인천 인물과 관련된 기록은 1923년이 최초이다. 1920년대 중반에 설립된 인천의 연극단체 칠면구락부의 멤버였던 임창복(林昌福)이 바로 그 인물이다.

 임창복은 1923년 이전에 이미 중국 상해로 유학을 떠났었던 듯하다. 여름방학이었는지 그해 8월 12일 일요일 오후에 "경구계(硬球界)에 명성이 고(高)한 임창복 군의 재인(在仁)을 기하야" 만철군(滿鐵軍)과 각국공원에서 시합을 가진다는 동아일보 기사가 보이는 것이다. 만철팀에 대적하는 인천군 선수는 임창복 외에 타운센드상회 2대 사장 맥코넬과 일본인 고교(高橋), 천정(淺井), 대전(大前) 등 5명이었다. 이들은 이듬해인 1924년 5월 13일 송학동 맥코넬의 저택에서, 주장 맥코넬, 간사에 임창복과 천정을 선임하고 국제경구구락부(國際硬球俱樂部)를 창설하기도 한다.

 임창복에 관련한 기사는 이보다 앞선 1923년 8월 4일자에도 보인다. 이미 앞서 7월 31일에 있었던 일본 신호고상(神戶高商)과 인천 최초의 경구시합에서 임창복이 ‘맹격(猛擊)의 묘기’를 보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 1923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는 ‘상해 경구 경기-동포의 1승 1패’라는 기사를 통해 그가 상해로 돌아가 테니스 국제시합을 가진 사실도 크게 보도하고 있다.

 "조선인으로 인천 경구계(硬球界)에 유일 선수 임창복 군은 방금 상해 진단(震旦)대학 예과에 재학 중인데 <중략> 임 군은 거월(去月) 22일 하오 2시 재 상해 각국인 전문학교 선수권 경구경기에 우승한 ‘아메리칸 칼레지’ 군(軍과) 단시합(單試合)을 하게 되었다 한다. 임 군은 여정(旅程)의 노독(路毒)으로 각기(脚氣)가 아직도 쾌(快)키 전이었건만 선명한 회선상(灰線上)에는 조선인 대 미국인의 경기 같은 관중의 시선을 이끌었었다 한다."

 인천 최초의 경구선수 임창복의 상해에서의 선수 활동은 이것으로 끝이 난다. 1923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는 그가 신병으로 그곳 세인트마리아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21일 귀국, 내리(內里) 자택에서 요양 중이라는 기사를 싣고 있는 것이다.

 문득 다시 정현 선수가 생각난다. 그는 페더러와의 준결승에서 발바닥 부상 때문에 아쉽게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발바닥은 더 단단해질 것이고, 그래서 그는 호주오픈을 넘어 세계 메이저 테니스대회를 차례로 석권하면서 새롭고 장한 신화를 써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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