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조직이든 조직원의 ‘재생산(再生産)’ 만큼 중요한 문제가 또 있을까.

 결혼을 통해 후대를 이으려는 가족에서부터 전투도 없는데 가상의 적을 설정해 놓고 막사 운영에만 골몰하는 군대에 이르기까지 재생산이야말로 소멸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며 효율의 극대화이다. 또 여야로 나뉘어진 정당(政黨)을 봐도, 영리추구가 유일한 목적인 기업을 봐도 조직원 재생산에 얼마나 열(熱)을 올리는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물건의 관점에서 보면 재생산은 생산의 끊임없이 반복과 갱신이며 사람의 경우는 조직의 목적에 부합하는 동일한 이데올로기와 기술의 도제식 전수다. 하지만 소멸되지 않고 영속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야 하는 조직과 달리 한번 영입된 조직원에 대해 사명을 다해 지켜내려는 조직은 찾아 보기 힘들다.

 스스로 선발한 조직원에 대한 비난과 배척, 홀대와 배신이 난무하다. 그것이 곧 조직의 약한 고리(Soft spot)를 만들고 생산품의 질적 하락과 위계질서의 내적 분란을 불러와 조직의 말소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이는 조직의 임원진을 비롯해 말단 조직원까지도 ‘저 녀석’을 대신할 제2, 제3의 대체재가 도처에 널려 있다는 안이한 판단 속에서 자행된다.

 하지만 난무한 ‘부품 교체론’은 자신도 ‘저 녀석’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같은 조직 내에서 ‘저 녀석’을 쳐 내는 ‘이 녀석’은 스스로는 이 조직 내에서 잘 재생산됐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래서 적어도 이 조직이 이미 ‘동조화’된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 속에서 희희낙락한다. ‘대체재의 널림’이라는 환영(幻影)이야말로 재생산의 최대 적(敵)이다.

 열렬한 정성을 쏟아 붓지 않고 재생산된 조직원은 조직의 허약화를 초래한다. 또 ‘너도 부품, 나도 부품’하는 조직은 세찬 바람 한 번이면 근간이 흔들리는, 뿌리도 미래도 없는 한시 조직일 뿐이다. 한시 조직에는 비굴한 조직원만 남는다. 조직의 이름으로 선발해 새로 들인 조직원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진정한 애정을 쏟지 않는다면 온전한 재생산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식을 키우는 애정어린 ‘담금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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