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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겸 시인
지난 주말 글 쓰는 동인 모임이 있어 대한문 인근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아마도 방금 전까지 집회가 있었는지 여기저기 쓰레기가 바람에 나뒹굴고 손 태극기마저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심코 버려진 손 태극기 몇 개를 수거해 손에 들고 카페로 들어섰다. 그러자 젊은 작가 몇몇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태극기 집회에 참석했었어요?" 라고 묻는 것이었다.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은 비단 우리 동인뿐만 아니라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젊은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손에 쥐고 있는 태극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개도 아닌 세 개의 태극기가 내 손에 있었고 나이마저 육십 대 이후로 보이니 집회에 참석했던 것으로 오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태극기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인가?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국기이자 상징인 태극기를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며 나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어 예의를 표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애국심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인가?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소수 세력들이 이를 왜곡하며 편협적으로 활용하고 있어 잠시나마 국민들이 불편한 시각으로 이를 바라봤을 것이다.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 선생이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당시 조선이었던 우리나라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할 때 처음 사용하게 됐고 이듬해인 1883년 8괘가 너무 복잡해 흰색 바탕에 4괘로 정리해 사용했으며 흰색 바탕의 중앙에는 적색과 청색의 태극이 도안돼 있고, 사방 모서리의 대각선상에는 건(乾)·곤(坤)·이(離)·감(坎)의 4괘가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흰색바탕은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모습, 즉 순수성을 나타내며 태극은 우주자연의 궁극적인 생성원리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빨간색은 존귀와 양(陽)을 의미하고, 파란색은 희망과 음(陰)을 의미하는 창조적인 우주관을 담고 있다. 4괘 중의 건(乾)은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坤)은 땅을, 감(坎)은 물을, 이(離)는 불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만들어진 태극기는 그후 도형의 통일성이 없어서 4괘와 태극양의(太極兩儀)의 위치를 혼동해 사용해오다가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국기의 도안과 규격이 지금의 형태로 통일됐다고 기록돼 있다.

 출근시간 용인시내에 진입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대형 태극기다. 고속도로 진입로나 시내 곳곳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태극기를 볼 때마다 적어도 중년을 넘긴 세대들은 나라에 대한 고마움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며 태극기를 향해 경배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공공기관의 태극기 게양과 태극기 거리 조성 사업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용인시의회에서는 올해 예산에서 집행부에서 넘어 온 태극기 거리 조성 관련 3천100만 원과 신혼부부 나라사랑 태극기 지급 예산 1천만 원에 대해 필요한 예산이 아니라며 전액 삭감한 사안에 대하여는 딱히 할 말을 잃어 버렸다.

 물론 당파 간에 정치적 의도는 아니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태극기가 특정 단체 집회의 상징성과 이미지를 연상시켜 삭감을 했다면 그것은 소모적인 당파 간 논쟁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태극기 물결의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8·15 광복과 88 서울올림픽,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그리고 오늘도 활활 타오르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성화와 함께 펄럭이는 태극기, 주요 경기가 있을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관람객들의 함성, 그들의 손과 손에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태극기가 자랑스럽게 물결치고 있다. 태극기 게양과 태극기 거리가 용인시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돼 정녕 애국의 상징인 태극기가 온 나라를 뒤덮었으면 한다. 물이 위에 있고 불이 아래에 있어 서로가 소통하며 대화가 된다. 태극기가 표상하는 것은 조화와 변화의 이치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건곤이감(乾坤離坎)의 정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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