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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훈 경기본사 경제문화부장
사전적으로는 ‘음력으로 그 달의 열 닷새째 날’이다. 굳이 이를 따지지 않아도 통상 ‘한 달의 중간’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중간 혹은 절반은 참 많은 의미를 지닌다.

 과거의 정점이며 미래의 시발이다. 지난 일들이 좋지 않았더라도 이를 다잡고 앞을 바라볼 수 있다. 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딱 좋은 시점이다. 전체를 놓고 봤을 땐 공평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반을 토대로 앞으로의 반을 유추할 수 있다. 동양철학에서는 중용(中庸)이 화두가 되기도 했다. 저서의 실체를 떠나 개념 자체가 중간 혹은 절반과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른쪽이나 왼쪽,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운데도 아니다’이다.

 어쨌든 일방적으로 기울지 않는 삶을 위한 중요한 이상향이다. 유토피아가 아닌 이상 현실은 동전처럼 항상 양면이 있다. 이 세계에서 기울지 않은 삶을 살기란 힘든 게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중용의 실천은 어렵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서두가 길었다. 길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관점을 통해 저마다의 입장으로 볼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들었던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벌어졌던 한 스케이터 이야기다.

 전제를 하자면 메달을 땄다는 결과와는 상관 없다. 물론 메달을 땄기 때문에, 그래서 세리머니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기 때문에, 그래서 시·공간이 주어져 큰절을 할 수 있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됐던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그 사건을 바라보는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사건 자체는 그 스케이터의 과오가 크다. 이 부분은 이론(異論)이 없다. 국가대표이며 올림픽이라는 단서를 단 이상은 그렇다. 단서는 바로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태극마크의 의의이며 ‘열심히 노력한 선수는 참가 자체에 의의가 있다’는 올림픽 정신이다. 국가대표 자격으로 참가하는 올림픽은 어찌 보면 앞서 말한 유토피아와 닮았다. 모두 이 단서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일단 국가대표가 그렇다. 대한민국을 대표하지만 본인의 의지 없이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 그를 국가대표로 만든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국가대표라는 제도권’ 속에서 그의 땀으로 실력을 통해 스스로 국가대표가 됐다.

 올림픽도 마찬가지이다. 참가 자체에 의의가 있다? 소위 ‘도전정신’을 언급한다. 하지만 룰을 보라. 이처럼 피 말리는 경쟁도 없다. 게다가 메달은 금·은·동 세 개뿐이다. 전 세계에서 상위 랭크 세 명에 들어야만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국가대표나 올림픽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국가대표와 올림픽 모두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또한 현실이며 그 또한 인간이다.

 단서를 단 이상 잘못을 하지 말아야 했건만, 했다. 그리고 질책도 쏟아졌다. 충분히, 때론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비난을 받았다. 본인 또한 반성을 하고 있다고 거듭 밝혔다. 이제는 됐지 싶다. 순간적으로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는 결코 죄인이 아니다. 정말 비약하면, 하다 못해 법을 어겨 가며 남에게 죄를 지은 범죄자에게도 반성을 하면 형량을 낮춰 주는 게 현실이다. 또, 한 번 교도소를 갔다 왔다고 해서 범죄자 낙인을 찍지 말자는 게 현실적 정서다.

 스물 다섯. 자기 언행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이나 100세 시대에 지금까지 해 온 것보다 앞으로 할 것들이 많은 때다. 이름처럼 중간 혹은 절반도 오지 않았다. 살다 보면 누구나 그렇듯 시기와 질투, 갈등도 겪기 마련이다. 뉘우쳤다면 그것으로 될 정도다. 진정으로 딛고 일어 선다면 이제는 응원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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