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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시인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仁川昔今)」에는 특이한 인물 이야기가 몇 편 실려 있다. 그 중에는 1920∼30년대 인천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김형관(金亨寬)이라는 대식가의 이야기도 있다. 앉은 자리에서 떡장수 목판의 인절미 쉰다섯 개를 몽땅 먹어 치웠다거나, 어느 결혼식 피로연에서는 교자상에 놓인 근 100명분의 음식을 혼자서 다 처치했다는 내용 등으로 다소 과장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김형관의 대식 일화는 참으로 놀랍다.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그는 다른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곁에서 서 말이나 되는 밥을 거의 혼자 다 독점했다는 내용도 있다.

 또 참외전거리 어느 호떡집에서는 냉수 한 그릇에 호떡 200개를 단숨에 해치워 내기를 걸었던 중국인 호떡집 주인 왕서방이 그만 손을 들어 항복하고는 "당신 사람이야? 소야?" 하며 혀를 내둘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형관이 음식을 먹고 탈이 난 것은 딱 한 번이라고 한다. 그가 항일 투쟁으로 서대문감옥에서 만기 출옥했을 때 "동지들이 대접한 ‘이문안 설렁탕’ 다섯 그릇을 오랫동안 기름기 없던 창자 속에 갑자기 집어넣고 뼈저린 냉돌방에서 자고난 탓으로 평생 처음 설사 한 번을 했다는 것"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천석금」의 ‘대식가 김형관은 지금 어디 있나?’라는 글 속의 인물 김형관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다. 단순한 대식가의 일화라면 그저 소화(笑話) 정도로 치부해 버리면 그만인데, 고일 선생은 그가 1920년대 고학생들 단체인 ‘칼톱회’ 회원이었다는 점과, 인천의 한 야간 노동학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는 점, 그리고 항일 투쟁으로 서대문감옥에 투옥됐다가 출옥했다는 사실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1930년 9월 2일자 동아일보는 고일 선생의 표기 ‘형(亨)’ 자와는 다른 ‘김형관(金衡寬)’이라는 인물이 경기도경찰부에 체포됐다는 기사를 싣는다. 이 김형관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출신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을 도모하다가 체포돼 2년 6개월 만인 1933년 9월 30일 만기 출옥한다. 바로 이 옥살이 내용이 고일 선생이 쓴 김형관의 서대문감옥 출옥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신문 지상에 등장하는 김형관은 체포되기 5년여 전인 1925년 6월, 이미 인천에서 이승엽(李承燁)과 함께 제2회 인천노동총동맹회 개최를 불허하는 인천경찰서 형사들과 담판하는 등 노동운동에 종사한다. 이 회에는 고일 선생도 김형관과 함께 인천노동총동맹회 임원 재선출을 위한 임시집행위원 자격으로 활동한다.

 그러니까 이 김형관은 인천에서 노동총동맹회를 개최하려던 때로부터 5개월 후인 1925년 11월, 모스크바로 건너가 그곳 공산대학에서 몇 년간 수학한 후 귀국해 활동하던 중 1930년에 체포되는 것이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이 고일 선생의 김형관(金亨寬)과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형관(金衡寬)이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다만 후자는 1939년 일제가 요시찰 인물로 촬영한 사진 속에 아주 세련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둥근 뿔테안경을 낀, 한마디로 인텔리의 풍모다. 서양 건물을 배경으로 비스듬하게 선 자세도 썩 멋스럽다. 5척밖에 안 된다는 고일 선생의 말대로 체구도 그다지 크게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보아도 ‘소처럼’ 먹어대는 대식가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김형관을 동일인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옥고를 치른 뒤 인천 외리로 돌아온 김형관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대식가 노릇을 했을 수 있다. 체구는 적어도 "가슴은 절구통처럼 둥글고 크며 탐스럽게 발달된 팔뚝의 근육은 쇠뭉치처럼 딴딴하고 다부진 데다가 힘이 장사였다"고 하니 대식(大食)이 가능했을 수 있다.

 그래서 고일 선생은 바로 이 대식 부분만을 기록했을 것이다.

 선생이 이 글을 쓰던 1955년은 휴전 직후로, 공산(共産)의 ‘ㄱ’자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온 김형관(金衡寬)을 김형관(金亨寬)으로 고쳐, 동년배 옛 동료의 대식 이야기만을 적을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그가 인천을 떠나 어느 하늘 아래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고일 선생의 마지막 이 구절이 또한 함경북도 출신 김형관이 간 그 어떤 곳을 함의(含意)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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