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이를 알리기 전인 4월 2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사전모임인 ‘13도 대표자 회의’가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열렸다. 인천 만국공원의 ‘13도 대표자 회의’는 한성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분석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현재 자유공원의 모습. <인천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이를 알리기 전인 4월 2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사전모임인 ‘13도 대표자 회의’가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열렸다. 인천 만국공원의 ‘13도 대표자 회의’는 한성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분석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현재 자유공원의 모습. <인천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모임 당일 아침, 권혁채, 홍면희, 안상덕 등과 함께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그때는 3·1운동 후 각 지방의 만세시위가 아직도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을 때라 일경(일본 경찰)의 경계가 삼엄했다.

인천역에 내리자 우리 일행은 일경의 불심검문을 받았다.

홍면희 등은 현직 변호사여서 무사했지만, 나는 그들의 의심을 받고 검색을 당했다. 홍면희가 나서 우리와 일행이라고 둘러대는 바람에 겨우 위기를 면했다." -이규갑(李奎甲, 1888∼1970)독립운동가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는 ‘13도 대표자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에 앞선 3월 초 이교헌과 윤이병, 윤용주 등은 당시 만세운동으로 수배 중이었던 이규갑에게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한다. 이규갑은 비밀독립운동본부의 한남수, 홍면희 등과 준비위원회를 열기로 합의하고, 3월 17일 현직 검사 한성오의 집에 모여 인천 만국공원에서 대표자 회의를 열고 임시정부를 수립해 이를 국민에게 공포하기로 결의한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 각지로 번져나가자 일경은 헌병들의 강압적 데모 진압과 주모자의 색출·검거·학살을 강화했다. 국내외 각지에서는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민족운동 최고 지도부로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된다.

당시 대표적으로 임시정부라 불릴 만한 곳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한 ‘노령정부’와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의 ‘한성정부’였다.

이 중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는 24명으로 조직된 전국 13도 대표 국민회의를 열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통해 ‘한성임시정부’가 탄생했음을 알린다. 또 ‘한성정부’의 수립 사실이 ‘연합통신’을 통해 세계에 보도됨으로서 국내·외에서 가장 강력한 임시정부로 부각된다.

중요한 점은 ‘한성정부’를 결성하기 위한 사전모임이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렸다는 사실이다. 각 지역 대표자들이 대회장소로 인천을 택한 것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전까지 외국인들이 밀집했던 ‘만국공원’의 국제적 상징성을 감안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당시 13도 대표들은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손가락에 흰 종이나 헝겊을 감는 것으로 서로의 신분을 확인했다. 그러나 실제 만국공원에 당도한 이들은 대략 20명 내외였다. 천도교·기독교·유교·불교 대표가 참여했으며, 지역에서는 서울·강화·인천·수원 등지의 대표들만 참석했다. 비록 모든 대표가 모이진 못했지만,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최초의 ‘의회’ 역할을 한 중요한 회의로 평가되고 있다.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은 "인천 만국공원의 ‘13도 대표자 회의’는 모두가 참석하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진행됐지만, 한성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회의가 인천에서 열린 것은 개항 이후부터 오랜 기간 축적돼 온 인천지역 민족운동의 열기와 역량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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