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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홍콩의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인 작품이 있다. 양가휘, 양채니, 장학우, 유가령, 임청하, 양조위, 장국영. 배우들의 이름만으로도 흥행은 보증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던 영화 ‘동사서독’의 결과는 뜻밖에도 초라했다. 관객들의 호불호도 또한 극명하게 나뉘었다. 이 영화는 김용의 무협소설 ‘사조영웅전’을 모티브로 제작된 만큼 그 외형은 무협영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내용은 어긋난 사랑으로 아쉬워하는 남녀의 감정선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1994년에 개봉된 이후 2008년 재편집을 거쳐 리덕스 버전으로 다시 돌아 온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구양봉이라는 인물 중심으로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다듬어졌다. 무협영화의 고정관념을 탈피한 작품 ‘동사서독 리덕스’를 만나보자.

 황무지 사막에서 주점 운영 및 암살 중개인으로 살아가는 구양봉에게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랑의 고통으로 자아가 분열된 여인, 아내를 그리워하는 맹인 검객, 남동생의 한을 풀고 싶은 가난한 누이, 뛰어난 무인이 되고 싶은 무사, 기억을 지워주는 술 ‘취생몽사’를 마시는 친구 황약사의 이야기가 구양봉의 주점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외딴 사막에서 은둔하듯 살아가는 구양봉의 과거 또한 밝혀진다. 그 역시 사랑하는 여인과의 헤어짐을 극복하지 못해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영화 ‘동사서독’은 이렇다 할 스토리라인이 없다. 이는 왕가위 감독 영화의 공통된 특징이다. 1990년대를 풍미한 시대의 아이콘인 왕가위 감독의 작품들은 어긋난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이를 견뎌내는 인간의 고독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는 무협영화의 외형을 한 영화 ‘동사서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주인공들은 긴 머리카락을 날리며 말을 타거나 커다란 검을 휘두르고 있지만, 이들 가슴에는 사랑의 상실이 가져온 짙은 고독과 허무가 함께했다.

 서사적 특징과 더불어 왕가위 감독의 시그니처는 감각적인 영상미이다. 물결처럼 흐르는 빛과 색채의 움직임, 과도하게 기울어진 앵글, 흐려지거나 구부러진 형상 등은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들은 지나친 서사의 압축으로 이야기는 빈약하고 탐미적 스타일만 가득하다는 혹평을 받기도 하지만 영화를 한편의 이야기가 아닌 기억과 인상에 대한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작품의 제목인 동사서독(東邪西毒)은 동쪽의 사악한 인물과 서쪽의 악독한 사람으로 직역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속 황약사의 별칭이 ‘동사’이고 구양봉은 ‘서독’이라 불린다. 즉, 두 명의 등장인물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영어 제목은 ‘Ashes of time(시간이 남긴 재)’로 못다한 사랑 뒤에 남은 잿가루 같은 상실의 흔적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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