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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락기 한국시조문학진흥회 명예이사장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잘 치르기 위한 하늘의 섭리라 여겼다. 다행히 잘 치러졌고 이어서 패럴림픽이 열린다. 정월대보름도 지났다. 예년 같으면 벌써 꽃망울을 내보일 텐데 우리 집 앵두나무는 이제야 눈을 비비고 있다. 함께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늘 곁에서 울고 웃었다. 이사도 했건만, 서울 끄트머리에서 용케도 목숨을 부지해왔다. 가지에는 하나둘 순꽃눈을 틔운다. 열악한 발코니 한 구석에서 저 바깥세상의 매화보다 늘 미리 피어 새봄을 안겨주었다. 연초록 꽃받침 사이로 터져 오르는 발그레한 꽃봉오리! 왠지 가슴은 뛰는데 쉬이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다. 순정이다. 앵두꽃의 꽃말은 ‘수줍음’이요, 앵두나무는 ‘하나뿐인 사랑’을 뜻한단다.

저 1930년대 명문장가 호암 문일평은 그의 꽃에 관한 시평집 「화하만필」에서 21번째 글감으로 ‘앵두꽃(櫻桃花)’을 들었다. 그의 글이다. 고려시대 천재 시인 이규보는 ‘봄에 빛 고운 꽃이여, 여름에 짙붉은 열매여(絳파春艶艶 朱實夏團團)’라고 하여 젊은이들의 사랑에 빗대어 꽃과 열매를 읊었다. 조선시대 문종은 앵두를 즐겨 드시는 부왕 세종대왕께 바치기 위해 온 궁원에 앵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청년 사관시절 어느 소녀와 앵두를 먹으며 사랑을 속삭였다고 소개한다.

 또한 세시 속담에 "처갓집 세배는 앵두꽃을 꺾어 갖고 간다"고 할 만큼 늦은 세배에도 사랑받는 꽃임을 암시하였다. 아울러 미인의 붉은 입술을 앵순(櫻脣)이라 형용했다. 이쯤 되면 선대에 앵두는 아주 귀한 대접을 받던 꽃나무인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데 오늘날 앵두는 거의 시중의 관심 밖에 있다. 누가 앵두를 귀한 과일이라 하던가. 꿈결 같은 이 봄날에 진달래 개나리 벚꽃 홍매화, 들들마다 산녘마다 지천으로 널렸는데 앵두나무 앵두꽃을 떠보기나 할까. 연면히 살아남아 길섶이나 산기슭에 꽃피우고 열매 맺는 그 모습이 가상할 따름이다.

요행히 우리 집 분재 앵두는 해마다 꽃과 열매로 아름다운 추억을 같이했다. 본인은 졸저 「바다는 외로울 때 섬을 낳는다」는 시집을 통해 ‘앵두꽃의 전설’을 노래했다.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앵두꽃 사연 속에서 시나 시조로 읊었다. 어릴 때 형과 누나들이 구전으로 노래하던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라는 유행가가 모토가 됐다.

1956년에 발표된 김정애의 대중가요 ‘앵두나무 처녀’를 동화처럼 들어 왔다. 당시 농촌 처녀총각들이 농사일이 힘들어 봄만 되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던 시대 상황을 희화화한 노래였다. 이즈음 앵두꽃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강원도 양양 명지리에서는 해마다 앵두사랑축제를 연다고 한다. 앵두마을이다. 다른 꽃에 비해 푸대접받는 때에 이는 참 대견한 일이다.

 생전에 우리 어머니는 늘 거실 소파에 앉아, 바로 곁 창밖에 보이는 앵두나무와 함께 하셨다. 발코니 한 쪽에서 말없이 숭어리 꽃을 피우고, 새빨간 열매를 오종종히 맺는 모습은 수줍음을 넘어 순정 그 자체였다. 잘 익은 앵두를 온 가족이 함께 맛보았다. 새콤달콤한 그 맛. 한데 이도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달라졌다. 유월에 거두어야 할 열매를 차마 딸 수가 없었다. 말끄러미 내다보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선연하다. 칠월에 들어서서 서너 톨이 남을 때도 그냥 두었다. 그립고 애석한 염원마저 끊을 수 없었다.

 앵두는 사랑의 ‘수줍음’에서 부모에 대한 ‘효성’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이는 항간에 떠도는 앵두나무의 전설과 상통한다. 병약한 노모를 모시던 한 농부가 앵두를 따드려서 먹고 낫게 했다는, 지극한 ‘효심’을 그린 이야기다. 지난날 고귀했던 존재가 오늘날 그런 대우를 못 받을지언정, 밑바닥에 흐르는 그 순정만은 수줍음에서 효성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마치 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시조가 한국 시가의 적자임에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거와 같다고나 할까. 그래도 시조는 시조이듯이 앵두꽃은 앵두꽃이다. 그 고결한 자리로 돌아와야 할 까닭이 상당하다. 단시조 한 수로 마감한다.

 <앵두꽃 사연>
 수줍어 수줍어서
 꽃망울이 발그레타
 
 어머니 그리움에
 꽃떨기로 피어설랑
 
 끝내는
 알알이 맺혀
 서러이도 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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