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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구 청운대학교 대학원장
대통령을 꿈꾸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성폭력범으로 철창 신세를 질 운명에 처해 있다. 현직 대통령이 권좌에서 쫓겨나 감방에 가 있고, 또 한명의 전직 대통령이 검찰 청사를 드나드는 것으로 보아 구속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중들로부터 존경받던 원로시인과 일부 유명 연예들, 성폭력 교수들이 대중들의 백안시(白眼視) 대상이 되고 있다. 모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터부(taboo)가 깨어진 결과다. 프로이트의 뒤를 잇고 있는 라캉(Jaques Lacan)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즉, ‘상징계’의 변화·발전에 둔감하거나 아랑곳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상징계는 인간들이 동물과 다르게 성취한 도덕, 관습, 법칙과 같은 ‘아버지의 법칙(Father’s Law)’을 말한다. 이러한 상징계는 오랜 시간을 두고 인간들의 삶 속에 이들을 축적해 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 전까지 허용했던 시대정신과 결별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시대에 걸맞지 않는 ‘아버지의 법칙’이 살해되고 있다. 그동안 폭력에 가까웠던 권력을 자신도 모른 채 휘둘렀던 자들이 ‘부친살해 퍼포먼스’에 무너지고 있다. 정치, 예술, 교육, 종교 등의 분야에서 국가와 아름다움과 영혼을 빙자해 본능적 욕망충동(Drive)의 발톱을 드러냈던 자들이 단두대(斷頭臺) 근처를 서성이고 있다.

 인간의 보편적 윤리를 어기는 자들은 욕망 충동에 충실한 자들이다. 이것에 충실할수록 인간의 일상적 삶은 피폐해 진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 속에 억압돼 숨어 있다. 누구나 그것과의 유희 속에서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도덕관념이 약화될 때 고개를 내미는 이것의 민낯은 비루(鄙陋)하고 추하다. 그 충동과 마주하고 있는 경계 너머의 카오스(caos)의 세계를 라캉은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명명했다.

이곳을 향하는 것은 ‘죽음 충동(death drive)’이고 치명적인 정신병과 같다. 이곳을 영화로 시각화한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e)의 ‘라 돌체 비타(La Dolce Vita 달콤한 생활)’라는 영화는 은유(metaphor)로 그물에 걸려, 멍한 가오리의 눈을 클로즈업하고 있다.

주이상스와 조우(遭遇)한다는 것은 ‘상징계’의 질서에서 벗어나 소위 ‘비정상’의 세계로 다가감을 의미한다. 옳건 그르건 변하는 상징계의 질서를 수용해 이것에 "속는 자는 방황하지 않는다"라고 라캉은 말한다. 오이디푸스는 이것을 수용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는 무의식 중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4명의 자식을 낳았고, 추후에 이것을 알고 나서는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찔러 광야에서 죽어간다. 그러나 한때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베 왕국의 저주를 풀어줄 정도로 똑똑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했다. 인간들은 모두 이러한 오이디푸스의 모습을 한 존재들이라는 것이 소포클레스의 생각이자 프로이트의 관찰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다른 작품 「안티고네」는 자신의 몰락을 각오하고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러준다. 아버지이자 오빠였던 오이디푸스의 딸인 안티고네가 외숙부이자 섭정자였던 크레온보다 빈약한 논리로 그 시대의 반역자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매장하길 원한다. 이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오이디푸스처럼 상징계 안에서 평범하게 욕망의 대상들을 치환하기보다는 ‘주이상스’를 향하는 안티고네의 언어는 그 시대의 ‘로고스적 언어’가 아니다. 안티고네는 연극의 시작부터 그 시대의 질서, 관습의 프레임을 거부한 것이다. 그녀가 몰락해가면서 그 시대가 금지했던 오빠의 시체를 묻어주는 용기는 그 시대의 상징계의 프레임을 바꾸는 동인(動因)이다.

 상징계의 ‘아버지의 법칙’에 속는 자가 방황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때로는 힘 있는 자들의 담론에 버성기고 있는 안티고네 같은 삶이 상징계 자체의 프레임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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