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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한반도 정세가 종전 65년을 맞이하며 요동치고 있다. 대한민국이 비로소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항구적인 평화에 직면할지 아니면 이 기대가 일순간의 물거품으로 꺼지고 말지 기로에 선 채 새봄이 찾아왔다.

 북한은 평창올림픽 폐막 이후 남한 측과 남북 정상회담에 합의하고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천명했다. 더불어 북미 간 대화를 적극적으로 원하면서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전략적 도발 행위를 유예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 달 열리는 3차 남북 정상회담이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한반도 평화 정착을 담보할 수 있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진정성을 믿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다.

북한은 1992년 제네바 합의부터 시작해 무려 25년간 8차례의 약속을 모두 파기한 바 있다. 지금까지 북핵 협상의 역사는 북한의 배신과 한미의 실수 연속사(史)에 지나지 않는다.

 1994년 미국은 북핵시설 동결에 대한 대가로 대북 무역·금융 제재를 잇달아 풀고 중유(重油)를 해마다 50만t씩 제공하기로 했다. 핵 시설 폐기가 아닌 동결에 이처럼 막대한 선물을 북한에 안겨준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중유 400만t을 받아 챙기면서 은밀하게 고농축우라늄 핵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미국과 수교 직전까지 갔다가 몰래 핵탄두를 개발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수교 합의가 무산되기도 했다.

2005년에는 9·19 공동성명이 백지화됐고 2012년 핵 미사일 시험 중단을 조건으로 24만t의 식량을 제공하기로 한 남한·북한·미국 간 2·29합의도 장거리 로켓 은하 3호 발사와 3차 핵실험으로 허사가 되고 말았다. 미국 조야(朝野)에서 북한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집단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서방 국가를 비롯해 북한과 외교 관계를 단절한 국가 모두가 북한에 대해서 그렇다.

 따라서 이번 남북 간 합의 이면에는 한미동맹을 와해시키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북한의 의도가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북한은 설령 비핵화를 수용해도 일부 핵무기를 감춰 놓으면 그만이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이 비핵화 뒤에 숨어 있는 함정이 되면 그야말로 남북, 북미 관계는 비극적인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아무리 미국이 핵 시설 사찰에 적극적으로 나서도 숨겨놓은 핵무기를 일일이 찾을 수도 없고 핵무기와 미사일 제조 기술까지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구심의 한쪽에는 이번 북한의 입장 변화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 또한 자리한다. 핵이 오히려 북한 체제를 전복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고난의 행군을 견디면서 핵무력이 김정일 시대에 완성됐다면 북한은 국제 사회에 핵 보유국임을 인정받고 미국과 당당하게 군축회담에 임하는 사태가 벌어졌을지 모른다.

결국 주한미군은 철수하고 남한은 북핵을 머리 위에 이고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북한은 핵무장은 했지만 주지하다시피 유엔과 미국의 전방위 경제 봉쇄로 돈줄이 거의 막히면서 이미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중국의 제재 의지 또한 이번만큼은 심상치 않다. 김정은은 핵으로 망가진 북한 경제를 북한 주민들의 인내와 희생으로 만회하기에는 신뢰와 영도력에 한계를 지닌 지도자이다. 체제 보호를 위한 가장 강력한 방패와 체제 이익을 위한 가장 공격적인 창이라고 여겼던 핵이 오히려 체제를 뿌리 채 흔드는 가장 위험한 도구가 된 셈이다. 만일 이러한 이유로 북한이 비핵화에 나선 것이라면 회담의 성과에 기대를 걸어 봄직하다. 한미동맹의 전제하에 북한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를 실행하고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 수교하면 된다.

한편, 미국이 핵 폐기 조건을 북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포기로만 제한한다면 상황은 평창올림픽 이전보다 더 악화될 것이다. 이번 남북, 북미 회담이 성공하면 그 공은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다. 세 사람에게 동시에 노벨 평화상이 주어질 수도 있다. 강력한 무기가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노벨의 신념과 무관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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