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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국제펜클럽 인천지부 부회장
발칸반도를 여행하는 중에 한국 여성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투숙한 호텔에서 조식을 먹는데 테이블에 합석한 한국관광객이 어제 여행코스였던 크로아티아의 폴리츠비체에서 50대 한국여성이 실족사했다고 한다. 환승 시간까지 포함하면 17시간이 넘는 비행거리를 날아가 먼 이국땅에서 듣게 된 죽음이 가슴에 턱 얹혔다. 다음 날 우리가 가 볼 장소인지라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진 것도 있었다.

 폴리츠비체 국립공원은 웅장한 산세와 수량 풍부한 급류가 흐르고 푸른빛 선명한 호수와 폭포가 장관을 이룬 곳인데 호수나 물길 위를 건너는 나무다리에 난간이 없어서 위험해보였다. 같이 온 친구가 갑자기 걸음이 빨라지며 앞서 걸어갔다. 낙차가 커서 여러 층으로 떨어지는 큰 폭포 앞에서 친구가 서럽게 울었다.

 어떤 장소에서 순간 가슴을 당기는 감정이 밀려오면 한마디로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뜨겁게 솟구쳐 흘러나온 용암이 식으면서 지형을 만들었듯이 시간이 지나면 날빛의 감정들도 희미해지고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았던 감정도 고요해지는 경험을 한다. 절벽도 급류도 수천의 시간 앞에서는 느려져 유순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견뎌야 하는 시간은 고통이고 더디게 흘러 힘들다.

 수천 년의 압력이 작용해 바다가 솟아 올라 산맥을 이루고 산맥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숭고한 세월에 비하면 사람의 일생은 한낱 하루살이 같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우주의 시간에 견주면 보잘것없는 시간일지라도 한 사람의 일생은 어수룩하지 않다.

 주름 잡힌 세월 속에 무수한 균열과 헛헛한 틈과 방황의 사막과 쉬어갈 위로와 노력의 결실을 맛본 다양한 감정들이 섞여 있다. 친구의 울음이 친구의 가슴에 박힌 상처임을 아는 나는 어설픈 위로보다는 지켜봐주는 것으로 친구와 동행했다.

 친구는 나무판자로 이어진 물길 위를 걸으며 사고가 난 지점이 어디쯤일까 하는 생각에 자꾸 걸음을 멈추게 됐고 생과 사를 가르는 마지막 몇 분, 그보다 더 짧은 몇 초의 시간에 주마등처럼 스쳤던 온갖 상념이 떠올라 감정이 복받쳤다고 했다. 친구는 타의로 자의로 가파른 협곡을 빠져 나오느라 힘이 들어서 거세당한 짐승처럼 속울음을 울었고 겉으로는 괄괄하고 씩씩했다.

 친구의 울음이 다행이라면 어폐가 있을 법도 하지만 친구의 무방비로 터진 울음이 반가웠다. 도망자로 세상의 눈을 피해 숨지 않아서 다행이고 용량을 초과한 짐을 계속 져야 해서 허리 굽은 노인이 되지 않아 다행이고 미움과 원망과 분노를 비워낸 가슴이 스스로를 무례하게 할퀴지 않아서 다행이고 현재를 용납하려는 결심이 보여서 기뻤다.

 죽음마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연사로 생을 마감한 사람은 그의 생이 타인의 눈에 보잘 것 없었다 하더라도 축복받은 생이라고 친구는 강조했다. 친구는 스스로 죽음의 문턱을 지나온 아픔이 있어서 사고로 죽은 사람 이야기가 나오면 격렬한 고통으로 힘들어했다.

 선명해서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물빛이 인상적인 이곳 여행지의 자연처럼 친구가 맑은 푸른빛으로 가슴을 채우고 돌아가기를 바라본다. 어차피 인간은 신보다 약한 존재이고 대자연의 웅장함에 비하면 못남이 정상이라 연약한 육신으로 한시적 생을 살 수밖에 없는데 미숙하고 허점투성인들 어떠랴 싶다.

 한계를 받아들이고 고개를 숙이는 일이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는 것이라 내키지 않아도 우리는 소멸을 향해 갈 것이고 세상은 나의 생이 끝나도 별일 없이 유지될 것이라 생각하니 이제 타인의 죽음에 감정이입이 돼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 하지 않을 것이라는 친구의 손을 잡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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