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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어머니가 들려주신 옛날이야기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권선징악적 교훈, 이타적인 희생과 용기를 통해 얻는 행운은 동화의 필수 요소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동화와 다르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소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그래서일까. 최근 어린이용 만화를 즐겨 보는 성인이 증가했다고 한다. 선하고 예의 바르며 편견 없이 화합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상세계를 만화가 구현하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판의 미로’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현실과 판타지의 세계를 샴쌍둥이처럼 공유하는 작품이다. ‘어른을 위한’이라 명명한 까닭은 오염된 세상을 잠시 벗어나게 해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품은 현실과 접점이 모호한 환상의 세계를 통해 우리의 오늘을 반추하게 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44년은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한번에 몰아친 시기이다. 동화책을 좋아하는 소녀 오필리아는 만삭의 어머니와 함께 새아버지가 있는 군부대 내 저택으로 이사를 온다. 오필리아가 당도한 곳은 파시즘에 대항하는 게릴라 군과의 전투가 한창인 참혹한 전쟁터였다. 하지만 이 숲에는 어린 소녀만이 느낄 수 있는 묘한 기운이 있었다. 현실과 전설이 뒤엉킨 비밀스러운 이곳에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마법의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겨주는 이 없는 냉랭하고 낯선 환경 속에서 오필리아는 그녀를 따뜻하게 품어줄 준비가 된 신비로운 세계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임무를 성공해야 한다. 용기, 인내, 희생을 감수했을 때 비로소 열리는 마법의 문. 과연 오필리아는 냉기로 가득 찬 현실 대신 따뜻한 지하세계의 공주가 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판타지 영화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멕시코 출신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2006년 작품인 ‘판의 미로’는 독특한 스탠스를 취하는 작품이다. 공상 혹은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판타지는 ‘오즈의 마법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세상을 통해 환상을 눈앞에 펼쳐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판타지를 결합시킨다. 이러한 설정은 자연스레 ‘왜’라는 의문을 환기시킨다.

 사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통과의례처럼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고 이를 통해 보상을 받는다. 그 과정은 등장인물을 성장시키고 독자에게는 깨달음과 즐거움을 준다. 영화 속 오필리아의 행보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으며 해결했을 시 동화 속 공주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적 시간성을 위해 초현실을 연결해 뒀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반정부군의 용기, 인내, 희생은 오필리아가 이행하는 과제의 성격과도 닮아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판의 미로’는 도피적 판타지에서 벗어나 현실과 조응하는, 더 나아가 과거의 상처와 희생을 위로하고 우리의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감독은 가장 힘든 시기를 상상력으로 버텼다는 인터뷰를 전한 바 있다. 어쩌면 델 토로의 판타지란 도피가 아닌 오늘을 견뎌내고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새로운 시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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