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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석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독일 지역은 1871년 통일되기 전까지 게르만계 군주국과 제후국의 국가연합 상태에 있었으므로 독일은 독일연방이란 느슨한 국가연합의 이름이었지 주권 국가 이름이 아니었다.

 북부 독일지역에 위치한 프러시아 왕국이 연방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이웃나라 프랑스의 방해를 극복한 후 게르만계 방국을 통합함으로써 통일 국가 독일이 탄생했다.

 19세기 독일의 통일은 흔히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으로 달성됐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프러시아는 덴마크 속령으로 있던 게르만계 주민이 다수인 슐레스비히와 홀시타인을 분리해 내기 위해 싸운 덴마크와의 전쟁(1864년), 독일연방제 개혁안에 반발해 먼저 선전포고를 해 온 오스트리아와의 전쟁(1866), 중부유럽에 영토적 야욕을 갖고 있어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를 빌미로 먼저 선전포고를 해 온 나폴레옹 III세의 프랑스와 전쟁(1870) 끝에 통일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 과정에서 프러시아가 거둔 전쟁의 승리는 표면에 드러난 하나의 사실일 뿐이고, 그 이면엔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비스마르크의 성공적인 외교이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가 지배 중인 폴란드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1863년 러시아와 알벤스레벤 조약을 맺어 프러시아 역내로 도피하는 폴란드인을 러시아가 추격할 수 있도록 허용해 프러시아-러시아 우호 관계의 단초를 마련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기 전 186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III세를 찾아가 회담하면서 벨기에를 포함한 영토적 대상(代償)을 시사해 프랑스의 중립을 확보했다.

 비스마르크는 또한 1866년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에 있는 베네치아를 이태리에 반환하도록 한다는 조건으로 이탈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이렇게 조성된 유리한 국제 환경에서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선공을 제압하고 1866년 프라하 조약을 체결해 북부독일연방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프러시아는 패전국 오스트리아에게 상징적인 배상금만 부과하고 실질적으로 영토를 상실하지 않도록 관대한 내용의 프라하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장래 예상되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비해 오스트리아의 중립이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비스마르크의 주도면밀한 외교력의 결과이다.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 후 독일 남·북부 연방의 통합 분위기가 고조되자 나폴레옹III세는 프랑스가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통합하는 것을 지원해 주면 프러시아 세력을 남부독일연방으로 확대하는 것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제안을 문서화해 줄 것을 요구해 보관하다 1870년 프랑스와 전쟁 전 ‘런던타임즈’에 흘려 프랑스를 경계하는 영국의 중립과 남북독일연방의 지지를 획득했다.

 비스마르크는 "흑해 중립조항 폐기"를 원하는 러시아에게 폐기를 권고함으로써 러시아와의 우호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로마를 회복해야 통일을 완성할 수 있는 이태리는 프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로마를 수비하는 프랑스를 지지할 수 없게 됐다.

 이런 국제환경에서 발생한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황제를 대표하는 베를린 주재 프랑스 대사가 모욕을 당했다는 구실로 프랑스가 프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프러시아-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나폴레옹 III세와 프랑스군은 1870년 세당에서 프러시아에 항복했고, 프러시아는 독일 통일을 달성했다.

 외교사적으로 본다면 독일 통일 과정에서 주역은 비스마르크였고 그 라이벌은 프랑스의 나폴레옹III세였다. 루이 나폴레옹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희구하는 프랑스 국민의 갈망을 충족시켜주고 자신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중립자 또는 조정자로 행세하면서 그 대가로 영토 획득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의 외교는 가톨릭 국가란 종교적 공통성이나 왕실의 유대에 근거한 환상에 사로잡힌 외교였지 비스마르크처럼 국가 이익을 기초로 한 세련된 기술 외교가 아니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로 치닫던 동북아 위기가 4월 말 개최 예정인 남북 정상회담과 5월 말이나 6월 초 개최할 것으로 보이는 미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로 소강상태에 있다.

 두 회담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이룩할 절호의 기회이다. 국민은 루이 나폴레옹식이 아닌 비스마르크 식의 성공외교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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