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불꽃 튀는 속도 경쟁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스피드 시대에는 빠름이 즉, 효율이고 돈이다. 빠른 사람과 빠른 물건은 응당 각광받는다. 빛의 속도에 범접한 인터넷 통신망은 빠른 정보의 습득과 처리를 가능하게 했고 이에 기반한 사람의 인식과 판단, 결정도 덩달아 빨라졌다. 이렇게 되면 느린 자와 느린 장비는 속도의 시대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다. 성찰과 반성의 가치를 상징하는 느림의 미덕도 자연히 실종된다. 빠르지 못한 판단은 우유부단함으로 치부되며 자성(自性)은 방구석 혹은 화장실에서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영역일 뿐이다.

 하지만 빠른 생산성, 효율성의 극대화에 초점을 맞춘 광역 도시의 한복판에서도 느림은 여지 없이 찾아 온다. 느림은 막는다고 막아지는게 아니다.

 산업단지 내 대형공장 굴뚝에서 피어 오르는 백연에서, 마천루 옥상 정원에 심어 놓은 벚꽃이 바람에 흩날릴 때, 꽉 막힌 저녁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택시 뒷좌석에서, 아파트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올 때, ‘4G’는 순간 끊긴다. 일방통행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빠름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느림의 속도 차이를 수정하기 위한 시간적 공백은 일단 ‘버퍼링’으로 채워진다.

 버퍼링 이후 다음 장면은 순식간에 복귀된 빠른 일상으로의 전환이겠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장면은 멈춘 듯 느리게 흘러가는 소박하고 해방된 시간이다.

 빠름 속에서만 살아가는 현대인의 몸과 마음이 그만큼 손상된 까닭이다. 저마다의 상처는 치유할 시간이 필요하다. 빠름은 상처를 살펴보기는커녕 건너뛰고 지나친 뒤 차곡차곡 덮어 둔다. 무조건 다음 단계로 가야 하는 빠름의 본질적 속성은 치유와 성찰을 거부한다. 느림의 시간을 버퍼링의 시간이라도 우리가 인위적으로라도 자주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행은 단연 가장 좋은 방법으로 꼽힌다. 하지만 빠름의 사회는 쉬는 날도 금전적 여력도 챙겨 주질 않는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넓은 공간, 탁 트인 곳을 자주 찾아 가거나 기계와 콘크리트를 피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바람을 쐴 수 있는 곳이라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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