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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현린 주필
얼마 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학 로스쿨 정원에는 ‘正義의 鐘’이라는 문구가 양각된 종이 걸려 있었다. 세계적인 법학의 전당,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상징이라 한다. 회고컨대 이 나라 법조인을 대량 양산해 온 서울법대다.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그 속에 곡학아세(曲學阿世)한 법조인들도 있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일류 법대라면 배출한 법조인의 숫자보다 ‘참법조인’이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하다.

 법원과 검찰 등 법조기관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두 눈이 안대로 가려진 채 한 손에는 형평과 공정의 상징인 천칭을, 다른 한 손에는 정의의 실현을 의미하는 칼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와 시비(是非) 선악(善惡)을 외뿔로 판단해 가린다는 상상의 동물 해치상이 설치돼 있다. 법조인들이 오고가며 나름대로 지침으로 삼고자 함일게다.

 내일 25일은 제55회 법의 날이다. 전국의 법조 기관마다 수장들은 올해에도 기념식을 갖고 ‘법과 정의’를 주제로 미문(美文)으로 잘 다듬어진 기념사를 통해 법원은 ‘법복의 무게’를, 검찰은 ‘정의의 칼날’을 강조할 것이다. 하지만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법복을 입고 있고, 정의감을 상실한 칼만 쥐고 있는 법관과 검사라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

 필자는 해마다 법의 날을 맞이할 때마다 ‘법이란 무엇인가?’ 자문자답하곤 한다. 과연 우리 법조계에 디케와 해치는 살아 있는가. 우리는 진정 법치가 이뤄지고 있는 나라인가.

 법을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검찰과 경찰이 오히려 수사 대상에 오르곤 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국민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툭하면 특검이다. 검찰이 불신을 자초한 것은 아닌지 검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법의 날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헌법 제1조 2항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엄연히 아로새기고 있다. 얼마전 정부는 사퇴한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의 임명을 놓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자인하면서도 임명을 강행하기까지 했다. 오는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출마자들은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하나같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며 ‘국민’을 내세우고 있다.

 ‘국민의 무게’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다. 국민의 눈높이야말로 상식이고 입법의 기준이다.

 최근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대한항공 오너 일가들의 갑질행위도 따지고 보면 법 집행의 침묵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에게 부끄러운 용어인 ‘갑질’이 해외 언론에 ‘gapjil’이라는 영자표기로 오르내리고 있다. 국격(國格)은 실추됐고 태극마크의 권위는 초라해졌다. 권문세족들 상당수가 치외법권이 미치는 권역에 살고 있는 신분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적폐다. 이들에게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애시당초 기대하는 것이 잘못이었다. 법이 살아 있다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다.

 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 사회는 말할 것도 없이 질서가 잡히지 않는 무법천지가 된다. 여기에서 나오는 말이 정치학 용어, ‘무질서보다는 독재가 낫다’는 말이다. 우리는 또다시 잘못된 전철을 밟아서는 결코 안 된다.

 법의 이상은 정의사회 구현이다. 법이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다. 침묵하고 있는 법은 이미 법이 아니다.

 정의(正義)에 관한 저술 책만 모아도 다섯 마차는 족히 넘으리라 추산된다.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이것이 정의(正義)다’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종은 울려야 한다. 전국의 사찰과 교회, 성당의 종은 울리지 않는 종이 없다.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다. 우리 법조계에 설치된 ‘정의(正義)의 종(鐘)’이 일제히 울리는 날, 이 땅에 ‘정의 사회’는 구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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