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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훈 경기본사 경제문화부장

개인적으로 요즘 무기력하다. 계절 탓도 있겠지만 가을도 아닌데 이런 때가 있었는지 싶을 정도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하는 고민? 좀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주 현실적인 모자람 때문이었다. 돈이다.

 며칠 전, 국토교통부의 아파트 실거래가 공개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인생 처음으로 독립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거처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일적인 이유 외에는 평소 관심 없던 부동산에 신경을 쓰려니 이만저만 머리가 아프던 찰나였다. 특정지역을 설정하고 얼마에 거래가 됐는지 확인한 순간 앞선 모자람이 확 밀려 들었다. 단 몇 년 만에 분양가의 두 배. 그것도 억(원) 단위였다. 만약 내가 그곳을 분양 받았다면….

 속물 근성도 근성이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았다는 자괴감이 더 컸다. 사회초년생 때 한 번의 행위 외에는 아파트에 청약을 하려 하거나 30년 넘게 한 집에만 살았기 때문에 전·월세 계약 행위조차도 한 적 없다. ‘미리 속물에 눈을 떠 이런 행위를 했다면 이런 자괴감은 없었을 텐데’ 하는 관념에 사로잡혀 친구들과 만남에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쩌면 행위의 자괴감이 아니라 ‘그 억대가 내 것일 순 없었나’하는 속물에 사로잡힌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문득 몇 달 전 기사를 통해 이런 내용의 통계를 본 적이 있음이 떠올랐다(기억에 의존한 진술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동자산 10억 원 이상을 지닌 인구는 24만여 명에 달한다. 즉, 총인구를 5천만 명으로 가정했을 때 1%도 되지 않는다. 돈을 버는, 수입이 있는 경제활동 인구를 제일 많이 버는 한 명부터 그 뒤 순서대로 나열했을 때 연봉 4천만 원 이상은 30%에 안팎이다(다시 언급하지만 숫자나 퍼센트가 틀릴 수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어찌 됐든 이 기억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는가. 그리 불쌍하지는 않다. 사실과 다를 수도 있는 이 내용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그래 왔다. 잘 곳 있어 왔고, 삼시세끼 굶은 적 없었으며 뭘 입어야 하나 절망한 적 없지 않은가. ‘그러면 됐다’ 하면 좋겠지만, 사고는 다른 고민으로 이동한다.

 난 왜 살고 있을까. 물론 어렸을 적 알게 된 그 진리, "‘왜’는 신만이 알 뿐 인간은 ‘어떻게’의 영역에만 있다"는 신념은 여전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질문은 ‘꿈이 뭐였지?’ ‘기자란 직업은 만족한가?’ ‘정말 사랑했던 여자는 누구였지’ 하는 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겉으로는 다른 고민으로 이동한 것 같았지만 결국 같은 사고였다는 걸.

 욕심(欲心)이었다.

 욕심은 잘 조절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겠지만 그리하기가 쉽지 않다. 맺고 끊음이 되지 않고 눈덩이마냥 커진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욕심의 노예가 돼 버린다. 그런 자아를 발견했을 땐, 차라리 낫다. 노예가 된 줄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또한 중독이다. 현실이지만 공자 같은 말씀은 여기까지.

 살면서 욕심을 부린다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찾아 들었다. 사전적 의미(욕심: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에 포함된 ‘분수에 넘치게’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최소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면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욕심은 활력이 될 수도 있다. 성취감 혹은 만족감도 일부 욕심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전면 부인할 순 없다. 비약을 가미하자면, 그것은 마치 도(道)가 카오스(chaos)에서 비롯된다는 개념과도 맞닿는다.

 나른한 이때, 살면서 한 번쯤 욕심이라는 사치 하나 정도는 안고 살아가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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