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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 속 학문과 예술의 여신인 뮤즈는 현대에 와서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예술가와 뮤즈의 관계가 반드시 이성 간에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남녀 관계는 때로 상하가 분명한 권력적 모습을 띠기도 한다. 더 나아가 창작의 영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때 뮤즈의 존재가치는 소멸된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 ‘팬텀 스레드’는 마니아적 팬덤을 형성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2018년도 작품이다. 그의 영화는 주로 카리스마 넘치는 집단의 리더와 그 속에 새롭게 편입된 이방인이 보여 주는 힘의 관계성을 흥미롭게 포착하고 있는데, 이번 작품도 그 연장선에 있다.

 1950년대 영국 런던, 유럽 최고의 패션디자이너 레이놀즈는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철저히 통제된 규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중 휴식을 위해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그는 새로운 뮤즈를 발견한다.

이민자 출신의 알마는 웨이트리스라는 직업에서 일류 디자이너의 연인으로 발돋움하며 신데렐라급 신분 상승을 맛본다. 까다롭고 예민한 레이놀즈를 위해 알마는 최대한 그의 삶의 방식에 자신을 맞춰야 했다.

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관계는 오래갈 수 없는 법이다. 언쟁이 늘고 관계가 지쳐갈 무렵, 언제나처럼 종언을 맞이해야 할 이들의 관계는 힘의 중심이 알마에게 옮겨가면서 전복된다.

 어머니 곁에선 누구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우자와는 때론 죽음을 떠올리기도 한다. ‘해로하다 같은 날 떠났으면 좋겠다’와 같은 대화는 부부 사이에서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이처럼 생명을 준 어머니는 무한한 삶을 상징한다면 배우자는 유한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배우자를 통해 생명의 유한성은 끊임없이 순환된다.

 영화 ‘팬텀 스레드’는 보이지 않는 ‘유령의 실’이라는 뜻으로, 바늘땀이 보이지 않을 만큼 완벽한 솜씨와 카리스마로 완성된 레이놀즈의 의상을 지칭한다. 이 작품은 예술가와 뮤즈로 대변되는 남녀의 관계를 통해 유한한 삶을 사는 존재와 그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레이놀즈는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웠다.

그리고 생애 첫 작품은 재혼하는 어머니를 위해 손수 제작한 웨딩드레스였다. 레이놀즈에게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었고 최고의 명성을 안겨 준 기술의 원천이었지만 영원한 상실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만들어 준 드레스를 입고 떠나버렸다.

 어머니를 잊지 못한 아들은 드레스를 짓는 것으로 어머니를 느꼈다. 그렇게 영원히 살 것처럼 오직 드레스를 만드는 일에만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반면 알마는 죽음을 자각시켰다. 오직 알마 앞에서만 아플 수 있었고,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던 레이놀즈는 그녀를 통해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게 된다. 끝이 있음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이전에는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비로소 알게 된다. 영화 ‘팬텀 스레드’는 죽음을 인식한 삶을 통한 사랑과 구원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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