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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남북의 정상들이 손을 맞잡고 활짝 웃으며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가슴도 울컥했고요. 이 감동이 선언에서 실행으로 옮겨져 역사에 기록되어지길 기대합니다. 적대적 관계에서 흔히 있는 파괴문화가 촛불혁명이라는 아름다운 시위문화로 승화돼 세계를 놀라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조각가 로댕의 조각품인 ‘칼레의 시민’에 담긴 이야기 역시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14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백년전쟁 당시,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칼레시를 대표해 죽음을 자청한 사람들을 기리는 작품입니다.

당시 세계의 초강대국인 영국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 칼레시부터 공격합니다. 워낙 작은 성이라 한 달 정도면 무난히 정복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칼레 시민들의 저항이 워낙 강해서 1년이 다가오는데도 성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화가 난 영국의 왕 에드워드3세는 성이 함락되면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몰살시키라고 명령합니다. 결국 성 안의 식량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항복의사를 전하자, 에드워드3세는 자신의 명령대로 칼레시민 모두를 몰살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한 신하가 조언을 합니다.

 "안 됩니다. 이제 막 프랑스 본토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함락시켜야 할 성들도 많은데, 항복의사를 보인 시민 모두를 죽였다는 소문이 나면 저항은 더욱 거세질 겁니다."

 일리가 있다고 여긴 영국왕은 칼레시민 6명만 죽일 테니, 그들을 데려오라고 명합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칼레시민들은 어떻게 여섯 명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대부분은 제비뽑기로 고르자고 했지만, 기꺼이 죽겠다며 나선 한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나라를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제비뽑기로 정한다면, 그들을 보고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재수가 없어서 죽은 것이라 하지 않겠소? 이렇게 되면 후손들 보기에 얼마나 부끄럽겠소이까. 그러니 자원하는 방식이 좋겠소. 나는 이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이고, 또 살 만큼 살았으니 나부터 자원하겠소."

 노인의 이 선언에 힘입어 순식간에 나머지 다섯 명도 손을 들어 죽음을 자청했습니다. 그리고 사형대로 끌려가는 여섯 명의 형상을 나타낸 작품이 바로 로댕이 10년이나 걸려 만든 ‘칼레의 시민’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본 시 당국자들이 난색을 보입니다. 작품 속의 사람들 모습이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무척이나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섯 명 중에는 형제도 있었는데, 동생은 아마 분위기에 휩쓸려 자원을 했는지, 울상을 한 채로 뒤를 돌아보며 입을 반쯤 벌린 모습이었습니다. 죽기로 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면서 슬퍼하고 있는 가족들을 돌아보고 있었을 겁니다.

이런 동생을 돌아보면서 형은 "돌아보면 안 돼. 마음이 약해져"라고 말하는 듯 보입니다. 또 한 사람은 죽음을 자청해놓고도 도저히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극에 달한 표정의 그를 두고, 훗날 사람들은 ‘우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두고 인간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했습니다. 당국자들의 생각으로는 여섯 명의 칼레 시민들이 영웅으로 그려지길 기대했습니다. 이에 대해 로댕은 이렇게 답을 줍니다. "이들이 위대한 것은 죽음을 초월한 영웅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처럼 죽음이 너무도 두렵지만 나라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자청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섯 명의 시민들이 만들어낸 이 감동적인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정표가 되어주곤 합니다. 이 이정표는 아름다운 전통이 되고 위기의 순간에 지표가 되어주곤 합니다. 지난주,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맞잡은 손과 도보다리에서의 진지한 대화라는 멋진 장면이 남과 북 양측이 선언한 대로 잘 이행이 되어 세계사의 위대한 사례로 남겨지길 바랍니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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