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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섭 인천시 지방이사관
통계청의 2016년 장래인구추계는 올해 신생아 수를 41만 명 선으로 봤는데 실제론 36만 명 선으로 급전직하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도 출생자가 50만 명이 넘었던 걸 상기하며 대단한 위험신호이자 국가와 민족 절멸의 위기라는 목소리가 높다. 인구소멸 혹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가능성 1위 후보가 한국이라는 거듭되는 예측부터, 인구대체수준(2.1명)을 훨씬 밑도는 수년째 세계최저 수준의 합계출산율(2017년 1.07명), 게다가 유례없이 초고속으로 진행되는 고령화까지를 놓고 보면 인구재앙의 공포를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해 국내 최대 일간지가 인구절벽 기획보도 맨 앞에 실은 한 장의 사진이 압권이다. 운동장이 모자랄 만큼 아이들로 가득 찼던 반세기 전 초등학교와 오늘날 축구팀도 제대로 꾸리지 못할 정도로 졸아든 어느 시골 초등학교의 극명한 대조. 그렇다면 과연 전자는 선(善)이요 축복이고 후자는 악(惡)이요 비극인가.

 인구가 많아야 꼭 좋은 게 아니듯 적다고 다 나쁜 건 아니다. 우리가 늘 부러워 마지않는 덴마크나 노르웨이, 핀란드 인구는 각각 600만 명이 안되고 스웨덴도 900만 명대에 지나지 않는다. 네덜란드는 땅은 대한민국 절반에 인구는 ⅓ 수준이다. 인구 800만 명대의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는 면적이 우리보다 조금 작거나 절반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인구도 800만 명 수준이다.

 우리 인적 자원의 질이 이 나라들보다 못해서 부득이 머릿수로 견딜 수밖에 없다고 우리 모두가 솔직히 인정하고 합의한 바라면 어쩔 수 없다. 거기서 시작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무엇인가. 4차 산업혁명을 일상적으로 운위하는 시대에 우리 뇌리는 여전히 양적(量的) 노동력이라는 집단 주술(呪術)에 사로잡혀 있던지 혹은 인구재앙 담론이 감추고 있는 수상한 이데올로기에 포획돼 있는 건 아닌가.

 과연 ‘합계출산율 → 생산가능 인구 → 성장잠재력 → 국가경쟁력’이란 등식처럼 이어지는 담론 앞에서 도무지 이견(異見)이란 필요 없는 것 혹은 없어야 하는가. 이와 같은 담론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권의 여야가 따로 없고 언론의 보수 진보도 따로 없고 학계와 현장도 큰 이견이 없어 보인다. 담론이란 게 이념과 가치, 혹은 계급적 이해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데 참 기이한 일이다. 마침 우리보다 앞서 인구재앙 담론이 풍미했던 일본의 대표 경제학자 한 명이 인구가 경제를 좌우한다는 사회통념과 달리 적어도 경제성장과는 무관하다(요시카와 히로시의 「인구가 줄어들면 경제가 망할까」)고 주장한 바도 있으니, 기왕의 인구재앙 담론에 시비를 좀 걸어볼 요량이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담론은 문제 지점에만 굵은 밑줄을 그어대는 반면에 목표지점에 대해서는 모호함을 드러낸다. 국가와 사회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 자체가 하나의 목표이며 정책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도 목표가 있어야 측정과 평가가 가능하다. 인구문제에 있어서 최우선 정책목표는 출산율을 어떻게든 높이는 게 아니라 적정인구(optimal population)의 수준이 돼야 한다.

 그런 정책적 모색과 연구가 없는 게 아니었다. 2006년 한 연구에 따른 한국 적정인구는 4천350만∼4천950만 명이고 같은 해 보건복지부가 제시한 규모는 4천900만∼4천950만 명이다. 2018년 1월 현재 우리 인구는 5천200만 명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적정인구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적정인구 규모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시나리오가 존재할 수 있다. 경제와 사회복지, 환경 관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수준의 삶이 기대되는 인구 규모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각각의 시나리오를 공론화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고 함께 노력할 게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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