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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전 인천시문화재단 대표이사

김활란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언뜻 인천 출신으로 이화여대 총장과 재단이사장을 지낸 김활란(金活蘭 1899∼1970)을 떠올린다. 그러나 또 한 사람 김활란(金活蘭 1888∼1984년)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이 김활란 역시 인천 출신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앞의 김활란보다 오히려 11살이나 연상으로 백 세 가까이 장수한 여성이다. 그에 대해서는 "여성 교육가. 감리교 장로. 인천 태생. 8세에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1908년 이화학당 중등과에 진학했고, 재학 중 일본에 유학했다. 귀국 후 1910년 이화학당에 설치된 대학과에 입학하여 1915년 2회로 졸업했다. 그 후 이화학당에서 수학교수로 재직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오르간 연주자로 정동제일교회 오르간을 반주했다. 1913년 최병현 목사의 아들 최재학과 결혼하여 이때부터 최활란으로 불렸다. 이후 YMCA와 미 감리회 여선교회를 중심으로 여성운동과 여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3년에는 유각경, 홍에스더와 더불어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를 창설했다. 1933년 정동제일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다 1963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84년 플로리다 주에서 별세했다."는 한 인터넷 기록이 있다.

이 간략한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이 두 김활란 모두 인천 출신이란 점이다. 그리고 똑같은 김 씨 성에 똑같은 세례명 활란(헬렌)과 똑같이 9세와 8세 무렵에 이화학당에 입학하고 졸업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점이라면 총장 김활란은 미국 유학을, 또 한 사람 김활란은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는 사실, 결혼에 있어서 한 사람은 평생 독신, 또 한 사람은 기혼자였다는 점이다.

물론 또 한 사람 김활란은 1913년 결혼과 더불어 남편의 성씨인 최 씨 성을 따랐기 때문에 최활란으로 불려 구별이 되기는 한다. 아마 세례명으로 이름을 개명한 터에 결혼을 하면서는 성까지도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인천 감리(監理)를 지낸 하상기(河相驥)의 부인 하란사(河蘭史)가 역시 김 씨 성을 버리고 남편의 하 씨 성을 택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에 대해서는 인천에서의 유소년 시절 기록이 남아 있어 인천에서 세례를 받고 영화여학교에 입학했던 사실이나, 초명(初名) 기득(己得)에서 활란으로 개명하기까지의 내력이 드러나지만, 또 한 사람 김활란, 곧 최활란에 대해서는 8세에 이화학당에 입학할 때까지 인천에서의 가정사나 가계에 대해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최활란의 뚜렷한 경력은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1923년 9월,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를 조직한 일이다.

이 단체는 초교파적 기독교 여성단체로서 여성들의 절제 있는 생활을 모토로 유각경(兪珏卿), 홍에스더(洪愛施德) 등과 결성한 단체다. 그 이전인 1919년 12월에는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이화숙(李華淑)과 함께 금주회를 조직해 금주금연과 애국사상을 고취했고, 1922년 5월에는 조선여자청년회를 창립해 회장으로, 그리고 1927년에는 근우회 결성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또 1934년에는 가정부인협회 한복연구위원으로, 1935년 조선직업부인협회 총무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펼쳤다.

그 밖에는 모교 이화대학의 이사였다는 1933년 11월 24일자 윤치호(尹致昊)의 일기 내용이 보인다. 최활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1915년 최재학(崔在鶴)과의 결혼 당시 그 결혼식이 국내 최초의 신식 결혼식이었다는 것이다.

 이옥수가 펴낸 「한국근세여성사화」에 나와 있다. 또 1907년 "당시 동경에서 유행하던 팜프도어(히사시카미) 머리에 양말과 구두를 신고 검정 통치마를 입고 귀국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907년이라면 앞의 이력에 나타난 연도와는 차이가 있지만, 일본 유학 시절 신여성으로서 선도적으로 서양식 치장과 복식을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또 한 가지, 최초의 오르간 연주자라는 점에서 인천 출신으로 역시 이화대학을 나와 한국 최초로 피아노와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했다는 김애식(金愛息 1890∼1950)과도 쌍벽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오직 인천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 다른 연관이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은 또 한 사람 김활란에 대한 연구도 우리에게 남겨진 한 가지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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