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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섭 문학 박사
유명한 고전 작가를 만나면 그의 첫 번째 작품과 마지막 작품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감상하는 독자들에게는 추억과 설렘으로 다가온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2천여 수의 시를 지었다. 선생의 ‘조선인·조선시 선언’은 우리 문학사의 빛나는 성과이다. 문학가로서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이 궁금하다.

 정약용 선생의 일대기인 ‘사암선생연보’에 의하면, 4세 때 처음 글공부를 시작해 첫 작품을 7세 때 완성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小山蔽大山), 땅의 멀고 가까움이 같지 않아서라네(遠近地不同)"라는 시였다. 원근법의 원리를 표현한 것을 보고 부친 정재원은 아들이 수학·역법 분야에 재능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어 10세 때 첫 번째 문집을 내어 주변의 감탄을 자아냈고, 75세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창작은 지속됐다.

 1836년 음력 2월 22일, 이날은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례 날이었다. "오래된 하피첩(霞巾皮帖)엔 아직 먹 흔적이 남았는데, 헤어졌다 다시 만난 것, 참으로 나의 모양 같네(회근시중에서)"라며 이 날의 기쁨을 시로 표현했다.

 다산 선생과 60년을 부부로 함께 살았던 부인의 이름은 홍혜완이다. 다산 선생보다 한 살 연상이다. 15세에 결혼해 젊은 시절부터 고생을 함께했다. 이런 아내에 대한 정을 시로 남기곤 했다. 1784년에 쓴 ‘남과탄(南瓜歎)’에선 "들어보니 며칠 전에 끼니거리 떨어져서 호박으로 죽을 쑤어 허기진 배를 채웠다죠"라며 가난을 견뎌내는 아내의 모습도 그렸다. 모함을 받고 유배형을 받고 비바람 몰아치는 한강가에서, "표정이야 비록 씩씩한 체 해도, 마음이야 나라고 남들과 다를 수 있겠나"라며 부인과 기약 없는 이별에 남편으로서 애틋한 마음을 남겼다. 강진에서 유배 시절 칠월칠석날(7월 7일)이면 "흐르는 세월 이 맘에도 못이 돼 눈물 떨어져 옷과 수건 적신다네"라며 홍 씨 부인을 생각했고, 남편 걱정에 잠 못 드는 부인에게 "그리워! 그리워라! 꿈속의 슬픈 님 얼굴"이라며 남편의 그리움을 천리 밖 고향마을에 전했다.

 유배 7년째인 1807년, 이해는 결혼 30년이 되는 해였다. 홍 씨 부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남편을 그리는 자신의 시와 함께 자신이 시집 올 때 가져온 상옷을 강진의 다산에게 부쳤다. 다산 선생은 부인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짓고, 부인의 치마를 마름질해 여러 폭으로 나눠 두 아들에게 경계의 말을 적어 서첩을 만들었다. 하피첩은 다산의 부부애를 상징한다. 200년 전인 1818년, 선생은 해배되고 부부는 다시 만났다. 유배 시절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졌다.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직접 농사 짓고 함께 고즈넉한 한강가의 풍광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그렇게 18년을 보내고 결혼 60년을 맞이해 회혼례 잔치가 준비됐다. 이재의(李載毅·1772∼1839) 등 친우들은 보기 드문 잔치에 축하의 글을 보내주었다. 황상 등 강진 제자들도 올라왔다. 다산은 기쁨 속에 아내에 대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군자의 좋은 배필, 화락하고 또 즐겁다. 옛 남군 어떻게 되었나, 이 사람 지금 그 사람이네. 오래 살기를 기원하노니, 산 같이 구릉같이"(‘회혼례 술잔에’ 중에서)

 머리 희고 성글어진 부인에게 ‘오래 살아요! 저 우뚝한 산처럼!’이라고 축원의 마음을 담아냈다. 일흔 다섯의 남편은 사모관대에 일흔 여섯 신부는 연지곤지를 찍고, 수줍게 마주해 사랑의 술잔을 나누며 해로를 간절히 소망한 내용이다. 남편의 간절한 이 마음은 다산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 사회는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헌데 황혼의 이혼은 늘어가고 가족의 소중함은 약화되고 있다. 부부 갈등, 가족 해체는 심화되고 가속화되고 있다. 정약용 선생의 부부애를 접하면, 세상의 역경을 함께 이겨내는데 가족은 힘이 된다는 깨우침을 얻게 된다. 5월 가정의 달, 100세 시대 ‘도반(道伴)’으로서 부부가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남양주의 가치이자 현재 우리에게 절실한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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