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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어릴 적 살던 주안 일원을 최근 걸었다. 첫 기억이 어린 지역은 오래 전에 사라져 지금은 다세대주택이 빼곡한 골목으로 특징 없게 변했는데, 주민들의 숙원이던 재개발이 하나둘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웃의 왕래로 살가웠던 예전의 마을로 되돌아갈까? 전혀 기대하기 어렵다. 옆집과 머쓱한 눈인사를 나눴던 다세대주택을 헐어낸 자리를 한결같은 초고층 아파트로 채울 예정이라고 한다. 송도와 청라 신도시의 초고층 아파트단지가 그렇듯, 낯모를 주민들이 스쳐지나갈 따름이겠지.

 연수구 기존 주거지와 송도신도시 사이를 가로지르는 제3경인고속도로를 달리다 남동공단을 지나 논현동 아파트단지를 지나면 느닷없이 높다란 콘크리트 건물들이 나타난다. 30층이 훨씬 넘어 보이는 배곶아파트단지로 꽤 질서정연하다. 매립한 갯벌 위에 같은 높이로 절도 있게 배열했기에 절벽으로 솟아오른 자세가 제법 당당하다. 단지 안에 들어서면 어떤 변화를 연출할지 궁금한데, 고속도로를 지나며 보이는 모습은 거의 혈거주택이다. 거대한 콘크리트 바위에 똑같은 주거 장치를 갖춘 천편일률의 주택.

 맑은 날 미국 애리조나에서 LA까지 비행기 창에서 내려다보면 사막 한가운데 똑같이 배열된 주택들을 무수히 확인한다. 주택 사이에 상가와 학교가 전혀 없다. 오로지 주택인 마을에서 가늘게 이어진 도로는 고속도로로 향하는데, 주 사이를 잇는 고속도로 양옆은 양판점이 늘어서 있다. 우리와 비교할 수 없게 거대한 양판점은 막대한 주차장을 펼쳐놓았고 온갖 편의시설과 상점으로 떠들썩한 양판점 안에 인파가 넘친다.

 땅 넓은 미국에서 주택단지는 도시에서 점점 멀어져지며 확산된다. 승용차가 없다면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스프롤’ 현상이다. 석유가격이 저렴하므로 가능한 미국의 스프롤 현상은 인적이 없는 교외에 단독주택단지를 밀집시켰는데, 우리의 스프롤 현상은 초고층 아파트단지가 기본이다. 30층 내외까지 건설단가가 상승하지 않는 기술을 바탕으로 건설업체는 가구 수를 늘렸지만 지나치다. 주민은 획일적 높이의 주거단지에 금방 지겨워할 테고, 아이와 청소년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추억을 남기기 어려울 것이다.

 초고층 아파트단지는 석유의 지원이 충분하지 않다면 존립이 불가능하다. 집에서 학교나 직장의 거리가 미국보다 가까우므로 교통에 들어가는 석유는 적지만 아파트를 초고층으로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가 적지 않다. 전기와 석유 가격이 오른다면 관리비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미 세계 원유의 공급은 소비를 감당하지 못한다. 대형 양판점에서 일제히 구입하는 식자재와 생필품도 마찬가지다. 석유 없이 적시적량 공급할 수 없는데, 지하매장에 쌓인 세계 각국의 음식은 대략 1주일 분량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로 도로가 마비된 후쿠시마 시민들은 한동안 구호식량에 의존해야 했다.

 주변 논밭에서 생산한 농작물을 구입하며 살가웠던 주안에 다세대주택이 빼곡해지면서 이웃은 서먹해졌다. 보급에 매진한 정부 정책은 골목을 똑같은 다세대주택으로 채웠지만 아파트가 인근에 들어서자 불편해졌다. 그런데 재개발로 허문 다세대주택 자리는 초고층 아파트단지가 볼썽사납게 차지한다. 주안의 재개발이 완료된다면 삶이 얼마나 삭막해질까? 신도시처럼 얼굴 익었던 세입자가 소외된 공간에 입주한 낯모르는 주민과 아이들은 아파트 규모와 자동차 크기를 서로 비교하며 경계할지 모른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높이로 집을 켜켜이 짓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한데, 획일적 구조의 아파트를 비슷하게 배열한 건설자본은 공원과 어린이놀이터까지 천편일률적으로 납품하려고 한다. 법적 요인을 충족하는 녹지에 화학제품을 푹신하게 깔고 그 위에 비슷한 조합놀이시설과 개성 없는 산책로는 주민을 이내 식상하게 만들 텐데, 그런 공간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추억은 얼마나 빈약할까?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은 생길까? 주택단지는 수용시설이 아니다. 다세대주택에 지친 우리는 건설자본의 이익에 최적화된 아파트를 원할 리 없다. 초고층 아파트단지에 지친 시민들을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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