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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전오 인천연구원 연구위원

2008년 창원에서 람사르총회가 열렸다. 습지보전을 위해 활동하는 정부기구와 시민대표, 전문가 등이 모여 습지 보전과 활용을 위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된 것으로 듣고 있다. 특히, 유럽인들에겐 생소할 수 있는 논습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 것도 창원총회 이후라고 알고 있다. 유럽에는 논이 없을 테니 논이 가지는 생물다양성 기능에 주목하는 아시아 출신 전문가들을 이해 못하는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논에서 물을 떠다가 짚신벌레를 키워 현미경으로 관찰하기도 했으며 논에서 수많은 개구리와 미꾸라지를 보았다. 심지어는 물살을 가르며 헤엄친다는 물뱀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도 서로 나눴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무심히 바라보았던 논이지만 논이란 존재는 아시아 최대의 생물다양성의 보고이고 우리나라 생태계의 근간을 이루는 산맥, 해양, 하천과 함께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야 마땅한 공간이다.

 그러나 농업기술 발달과 함께 논의 생태적 기능은 크게 훼손돼 다양한 생물의 공존공간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쌀을 생산하는 단순한 공간으로서 겨우내 비어 있고 여름 내내 벼가 자라는 그냥 그런 공간으로 잊혀져 있었는데 2008년 람사르 창원총회는 논습지의 가능성을 크게 강조하고 인식을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인천시 자연환경조사를 다니면서 아쉬웠던 것은 인천이라는 공간영역 속에서 논이 차지하는 면적은 실로 적지 않으며 이들 공간이 생태적인 기능을 크게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모내기에 앞서 논둑을 따라 제초제를 열심히 치는 농부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제초제를 줄여야 한다고 웬만한 환경 관련 책에는 기본으로 나오는데 현장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2018년 봄, 경기도 안성에서 농사를 짓는 장인어른을 따라 모내기를 앞둔 논에 나가 보았다. 본인 소유의 큰 논 하나와 도지로 농사를 짓는 작은 논 두 개에서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셨다. 논길을 걸으면서 장인어른께서는 올해까지만 농사를 하시겠단다. 몸도 점점 좋지 않고 힘이 들어 농사짓기가 힘드시다며 조그만 텃밭만 유지하고 나머지는 정리하시겠단다. 그러며 누렇게 떠있는 논둑을 가르키신다. 예전 같으면 예초기로 깔끔하게 깎았을 터인데 이젠 힘에 부쳐 경사진 논둑을 예초기로 깎을 수 없다며 올해부터는 제초제를 뿌린다고 하신다.

 우리는 연구할 때 항상 대안을 제시한다. 대안 없는 문제제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럼 우리가 제시하는 대안이 진짜 대안일까? 책상에 앉아, 간혹 찾아가는 현장답사를 통해서, 보고서와 논문의 틀을 갖추면 진짜 현장에 맞는 문제 제기와 현장에 맞는 대안이 나오는 것일까?

 장인어른과 평생 함께한 그 논둑이 누렇게 떠 있을 때 내 마음 한 켠도 누렇게 뜨는 것을 느낀다. 2008년 람사르 총회 이후 우리는 농업공간에 대해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진짜 대안을 얼마나 진지하게 만들어 왔을까? 팔순의 노인이 당당하게 생명을 키우는 농사를 자식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대안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올 봄에도, 다음 봄에도 써레질하는 논에서 농부의 뒤를 쫓는 무수한 백로의 무리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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