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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사)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1876년 2월 9일(음력 1월 15일) 구로다(黑田淸隆) 전권대사 일행은 강화도에 기항, 예포라고 하며 각 군함으로부터 위협 발포를 하면서 강화도에 상륙했다.

 회담은 이틀 후 2월 11일 하오 1시 강화도 연무당에서 시작되었는데, 주로 운요호사건에 대한 조선의 사죄와 책임문제가 논의됐다. 회담은 ‘연일’ 3차에 걸쳐 속개됐고 ‘10일의 기한’ 내에 회답을 주지 못하면 양국 간의 국교는 단절된다고 위협했다. 수모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결국 회담 개시 18일 만인 2월 27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 조인하고 비준서를 교환하고 말았다.

 일본은 당시 조선 관리가 국제 정세에 어두움을 기화로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던 ‘관세’조항을 의도적으로 조약에 삽입하지 않는 사기적 수법을 동원했다. 관세 징수는 국가가 외국으로부터의 상품 유입에 맞서 국내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해 취해지는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로, 그것은 동시에 중요한 국가 재정수입이 되기 때문에 외국과의 통상관계에 있어서 반드시 수반돼야 할 제도였고 이미 각국의 조약에 반영 시행되고 있었다. 단지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강압 때문에 관세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맺은 일종의 자유무역협정이었다.

 후일 부산을 개항한 뒤에야 관세 자주권의 중요성을 깨달아 일본과의 관세 재조정 협상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부산 앞바다에서 함포를 발사하고 병사들을 상륙시키는 등 무력시위를 계속했기 때문에 불발에 그쳐 버리고 말았다.

 1882년 5월 22일 서양과 최초로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또한 불평등, 굴욕적 조약이었지만 세관의 입장에선 조선이 처음으로 부산 개항 후 7년 만에 ‘관세 자주권’을 보장받은 조약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외국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대한 지식이나 서양인과 소통할 수단과 이를 운영할 인력도 갖추지 못했다. 더구나 관세를 수납할 은행이나 근대적 부두 등 항만시설도, 창설에 필요한 자금까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이 새로운 조직 도입을 앞두고 불가피하게 청나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정부는 1883년 4월 24일 현재의 관세청에 해당하는 조선해관본부인 총해관(總海關)을 창설하고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총세무사로 그리고 6월 16일 인천해관을 개설해 해관장(海關長)에 영국인 스트리플링을 임명했다.

 개청 당시 인천해관에 배치된 직원들은 모두 외국인으로 영국인 1명, 독일인 3명과 러시아, 프랑스, 미국, 청국, 이탈리아인 각 1명씩 9명이었다. 조선인으로 인천해관에 처음 배치된 사람은 홍우관, 남궁억 등으로 1883년 설치된 관립영어학교 동문학(同文學)에 입학해 1년간 영어를 배운 제1회 졸업생이었다.

 1883년 6월 16일 인천해관이 개설되면서 인천항은 본격적인 개항장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관세(關稅)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예에 따라 일반 품목의 경우 상품 값의 10%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9월 19일부터는 인천, 부산, 원산 등지의 개항장에 감리(監理)를 두어 해관 업무를 감독하도록 했고, 10월 8일에는 해관세(海關稅) 수납은행으로 일본제일은행의 각지 지점이 지정됐다. 그러나 11월 영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수정, 조인하면서 일반상품의 관세율은 7.5%로 낮아지게 됐다.

 해관은 자체적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기관으로 해관 운영비와 해관요원들의 보수는 해관수입금에서 우선적으로 지출됐다. 그리고 조선의 근대화 사업을 위한 자원금으로 이용됐고, 국가채무를 변제하는데도 사용됐다. 해관 수입금은 수출·입품에 대한 관세와 톤세 등의 합으로 이뤄졌는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수입품에 부과하는 관세였다. 그러나 위정자들이 관세 전반에 관해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었고, 정부는 관세의 수입을 단지 궁핍한 재정을 타개하기 위한 국고 수입증대 신재원으로만 파악했다.

 관세 수입은 매년 증가해 정부 재정에 응급적이고도 다각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개항과 자강(自强)에 수반하는 효용적 자금으로 운용되지 못했다.

 외세는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 그들을 탓하기 전에 내실부터 기해야 함이 옳다. 현재도 급변하는 대내외 정세에 맞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데, 혹 민심보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의 국가관이 뒤처져 있지나 않은지 반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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