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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연 수필가
봄비가 몇 번 추적추적 내리고 나면 대지는 여기저기 연두색 새싹이 기지개를 켠다. 생명이 움트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농부에겐 이런 낭만도 잠시, 초여름 문지방이 가까울수록 잡초를 깎을 걱정이 가슴 한편 가득이다.

 엔진 달린 예초기로 풀을 깎는다. 매실 밭 주변의 풀은 물론 종친회 선산의 벌초까지 도맡아 한다. 예전엔 손수 낫으로 풀을 깎았는데 힘든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 신기할 뿐이다.

 나이 들어 힘에 부친 내 모습을 지켜본 이웃 농부들은 제초제를 뿌리면 편한데 왜 바보처럼 풀을 깎느냐며 지청구를 준다. 하지만 한 귀로 흘려버린다. 마치 흑사병에 걸린 듯 땅속의 미생물마저 검게 변질시킨 독성은 결국엔 바람을 타고 농부의 호흡기를 잠식하기 때문이다.

 하루 서너 시간씩 4~5일의 작업이 끝나면 강철로 만든 예초기 날은 눈에 띄게 모양이 변해 있다. 파란 칠은 흔적도 없어지고 윗날은 어느새 대머리 이마 모양을 하고 있다. 무디어진 날을 뒤집어 끼운 후 며칠이 지나면 30㎝이던 강철 칼날은 키마저 20여 ㎝로 짧아져 본래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간혹 돌멩이의 거센 저항에 칼날이 거친 비명과 섬광을 내뱉기도 하지만 예초기 칼날을 새 것으로 교환할 때마다 새삼 쇠보다 강한 풀의 위대함에 경의를 표한다.

 잔잔한 바람결에도 하늘거리는 연약한 풀을 깎았을 뿐인데 그 무엇이 쇠 중에서도 가장 강한 강철로 만든 예초기 칼날을 저리 애달도록 만들었단 말인가. 누가 잡초를 연약한 미물이라 했던가.

  평소 돌배기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에도 꺾어지고 콧바람에도 하늘거리는 생물로 여겼던 풀은 우리가 아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엊그제 풀을 깎은 것 같은 기억인데 어느새 자란 풀들은 예초기에서 퇴역해 수북이 쌓여 있는 쓸모 없는 강철 칼날을 바라보며 환희의 합창을 부르고 있다. 유연한 연두빛 풀의 끈질긴 승리가 자랑스러워 보인다.

 장마철 빗물도 풀과 다를 바가 없다. 열반에 드신 성철 스님은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했다. 언젠가 장마철에 하늘에서 물폭탄이 터졌을 때 인간이 흙으로 메운 계곡의 공동묘지는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산기슭 원형의 모습을 드러낸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성난 물은 빈자리를 채우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원상복귀시키는 초능력도 갖고 있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린 장마의 물 폭탄 위세를 지켜보며 물의 양면성을 생각해 본다. 혹자는 ‘물에 물 탄 듯’하다며 우유부단의 대명사로 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젓는 아기의 손길조차 거절하지 못하고 순순히 돌아가는 나약한 물줄기는 오랜 세월의 인내와 끈기로 바위에 구멍을 뚫었고 동굴 안의 종류석탑을 만들기도 했다.

 어릴 적 송사리 떼와 같이 시냇물에서 미역 감던 추억만을 간직한 이들에게 물은 고요한 호수와 별다를 게 없지만 장마 때 범람하는 강물을 지켜본 수해지역 주민들은 불보다 더 무섭다는 솔직한 심경을 털어 놓았다.

 산사태 혹은 쓰나미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뿌리를 드러낸 채 누워있는 고목과 집채만한 바위덩어리의 참혹한 잔유물을 물의 전횡이라고 상상할 이들이 얼마나 될까.

 잔잔한 물은 때로는 태산 같은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철학자이자 도가의 시조인 ‘노자’도 「도덕경」에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서로 다투지 않고, 뭇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기꺼이 자리하니 이를 도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세상 모든 것에 차별 없이 유익을 주되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쓸어버릴 수 있는 큰 힘이 있지만 스스로 낮은 곳에 임하는 겸손을 갖추었기에 아마도 농작물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닐까.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지만 농부는 풀과 물을 통한 자연의 섭리를 깨달으며 철이 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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