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도 아닌 무(無)수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경기지사 당선인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줄곧 이렇게 표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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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냉장고에 과일을 넣어 두고 실컷 먹는 것이 꿈이었다"던 이 당선인의 성장 과정은 그야말로 우리나라 소외계층의 고통과 수난을 상징할 만큼 고달팠다.

 어린 시절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던 그는 인권변호사와 민선5·6기 성남시장을 거쳐 이제 민선7기 경기지사로 당선된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로서 자신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 상처로 얼룩진 소년공

 이 당선인은 1964년 경북 안동시에서 가난한 화전농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0살 무렵 아버지가 돌연 집을 떠났고 어머니 홀로 남매들과 화전을 일구며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했다.

 춘궁기가 오면 ‘참꽃’이라 불리던 진달래로 허기를 달랬고, 그와 형제들은 감자를 캐고 콩밭을 일궜다. 그는 이때 이미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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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첫 교복을 맞춰 입은 이 당선인이 대학교 입학식에서 어머니와 찍은 사진.
초등학교를 마친 이 당선인의 가족은 일자리를 찾아 성남의 빈민촌에 정착했다. 나이가 어렸던 그는 중학교 진학 대신 다른 사람의 신분을 빌려 여러 공장을 전전하는 ‘소년공’이 됐다.

 이 당선인의 공장생활은 힘겨웠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의 손가락에는 아직도 고무조각이 박혀 있고 후각세포도 55% 이상 괴사했다. 프레스기에 팔이 눌리는 사고를 당해 평생 장애도 안게 됐다. 이 팔의 장애로 인해 훗날 병역이 면제되면서 그는 군대조차 갈 수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좌절이었다고 회상한다. 평범한 궤도에 올라 차별받지 않는 것이 이 당선인의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공장 관리자가 ‘고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관리자가 되면 매 맞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공부에 매진,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 우연이 빚은 운명, 법대생 이재명

 1980년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학력고사만으로 대학에 갈 수 있게 됐고 장학금 제도도 대폭 늘었다. 한 가닥 희망을 발견한 그는 일과 공장일을 독하게 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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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변호사 시절 이재명 경기지사 당선인
 이 당선인은 학력고사에서 서울대학교 법대 커트라인과 일치하는 점수를 받았지만 ‘전액 장학금 월 30만 원’이라는 조건을 내건 중앙대학교 법학과 진학을 결정했다.

 태어나 한 번도 교복을 입어 보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이 당선인은 아무도 입지 않는 대학 교복을 맞춰 입고 대학 입학식에 가기도 했다.

 1982년 우연히 유인물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접하게 된 그는 권력과 언론에 속았다는 분노를 느꼈다. 이를 계기로 ‘정의 구현’을 삶의 방향으로 결정하게 된다.

# 판검사 대신 택한 인권변호사, 시민운동의 길

 사법연수원 성적이 좋았던 이 당선인은 판검사 임용을 앞두고 갈등했다. 집안 형편을 고려한 현실과 이상의 딜레마였다. 그러던 중 그는 당시 인권변호사로 알려졌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의를 듣고 그의 철학에 매료된다.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던 노 전 대통령의 말을 믿고 싶었던 그는 1987년 7월 14일 일기장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나의 지식과 자격을 필요로 한다. 역사가, 민족이, 노동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민중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결의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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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당선인의 사법연수원 수료식.
 변호사가 된 이 당선인은 성남에서 주로 노동과 인권변호를 맡으며 민변 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공정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소신으로 시민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당시 그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는 ‘시립병원 설립’이었다. 성남 옛 시가지의 대형 병원들이 문을 닫으며 의료공백이 심각해진 탓이었다. 이에 시립병원 설립을 목표로 주민 발의 조례를 냈으나 시의회로부터 날치기를 당하고 만다. 서러움을 느낀 이 당선인은 시민의 권한을 대리하는 시장이 돼 직접 시립병원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정치 입문을 결심하게 된 순간이었다.

 # 시민의 주인인 성남, 이제는 경기지사로

 이 당선인은 2010년 51.2%의 득표율로 성남시장에 당선됐고, 취임 직후 비공식 부채 6천500억 원을 청산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SNS로는 시민들과 의견을 나누며 시정을 보완해 나갔다.

 2013년 그는 정치 입문의 계기가 된 시립의료원의 첫 삽을 떴고, 2014년 득표율 55.1%로 재선에 성공한다. 이때 보수 텃밭이던 분당구에서 득표율이 오르는 이변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 당선인은 ‘청년배당’, ‘공공산후조리원’, ‘무상교복’으로 대표되는 3대 무상복지의 성과를 거뒀고, ‘시민이 주인인 성남’이라는 슬로건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자 그는 촛불의 선봉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쳤고, 단숨에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경선후보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높였다.

 2018년 지방선거를 통해 이제 경기도민들은 그에게 경기도에서 그 쓰임을 다하라고 명했다. 이 당선인은 경험과 실적, 성과를 바탕으로 도민이라면 누구나 자긍심을 느끼는 ‘새로운 경기’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남궁진 기자 why0524@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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